brunch

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31. 손실

by 히말

화염 저항이 크게 낮아졌지만, 한상태는 기죽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도 어찌어찌 잡았던 상대다.

더구나 부츠의 화염 저항은 아직 남아 있다.

그는 노련하게 화염 정령과의 거리를 조절하며 탱킹했다.


길수연도 칼 같은 힐을 통해 최대한 자원 소모를 줄였다.

원래도 오버힐을 잘 안 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지금 상황은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너무 위태로워 보일 것이다.


“빨리, 이쪽으로!”

한상태가 외치자, 공격대원들은 한상태가 가리키는 지점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어느새 다리를 거의 다 건너왔다.


이제 한 마리, 운이 없더라도 두 마리만 잡으면 지옥불 호수와는 작별이다.

마지막 한 마리가 되기를 기도하며, 한상태가 화염 정령을 풀링했다.


뜨거운 공기 속에서, 한 시간 가까이 정신 집중을 계속해 온 공격대원들의 피로가 극심한 수준에 다다랐다.

아직 화염 오라가 꺼지지 않은 화염 정령에게, 장혁수가 에픽 숏소드 ‘오캄’을 휘두르며 다가갔다.

뜨거운 공기에 정신줄을 놓은 게 분명했다.


“장혁수!”

박충기의 외침에 놀란 장혁수가 화염 정령에서 멀어지기 위해 백 점프를 했다.

너무 멀리.


다리의 동쪽 언저리를 지키던 오크 부대가 장혁수를 보고 달려들었다.


파박!

2탱 성나린이 다리에서 점프를 해서 동쪽 기슭으로 착지했다.


성나린이 포효하자, 장혁수가 몰고 온 오크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장혁수는 뒤로 물러나면서 성나린에게 오크들의 분노를 넘겨줬다.


성나린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 적의 수를 헤아렸다.

여덟, 아니 아홉이다.


“빠야르 데킨!”

오크 주술사가 그렇게 외치면서 허리에 맨 북을 두드렸다.

순간, 오크들의 눈이 붉게 변했다.

오크 여덟 마리가 동시에 광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런. 애드는 계산하지 않았는데.'

예상외의 전개에 이준기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패시파이어를 든 자신이 성나린을 도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준기는 시위에 당겼던 얼음 화살을 화염 정령에게 날리자마자, 성나린을 향해 뛰었다.

그녀를 둘러싼 오크들 중 한 마리에게 패시파이어를 날렸다.


- 치명타! 45!

- 오크 돌격병에게서 ‘광란’ 효과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칼날을 수직으로 세워 오크 돌격병에게 붙으면서 이준기는 마나 폭발을 시전했다.


- 마나 폭발로 오크 돌격병에게 45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 오크 돌격병이 죽었습니다.


“책, 거의 다 썼어요. 힐 부족합니다!”

성나린에게 힐을 퍼붓던 2소대 힐러, 최아람이 외쳤다.

오크 아홉 마리의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받는 성나린의 체력은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다.


“저는 됐으니, 성나린 탱커에게 힐을 주세요!”

한상태가 그렇게 외치면서, 이제는 주먹을 휘두르는 풍선이나 다름없는 화염 정령을 다리 건너편으로 끌고 갔다.

소대 딜러들이 2탱 성나린을 돕기 위해 몰려갔다.

길수연도, 하정태도 성나린에게 힐을 집했다.


“좋다, 이거야!”

들러붙는 오크 돌격병을 방패로 밀어내고,

성나린은 오른손으로 고쳐잡은 롱소드를 바닥에 쓰러진 오크 주술사의 배에 찔러넣었다.


“다음은 누구냐!”

호기롭게 외치며 뒤를 돌았지만, 오크 주술사는 죽지 않았다.

기어서 뒤로 물러난 오크 주술사는 상반신만 일으킨 채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레르크 히돈 샤하페츠.”


“뒤로 피해!”

주문의 의미를 아는 이준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오크들에 둘러싸인 성나린은 피할 곳이 없었다.


***


퍽!


오크 주술사의 사악한 주문에, 성나린을 공격하던 광란 오크 한 마리가 선 채로 폭발했다.

주술로 인해 강산성 부식 물질로 바뀐 오크의 피가, 성나린을 덮쳤다.

판금 갑옷으로 전신을 덮은 그녀였지만, 목과 얼굴은 가려져 있지 않았다.


치이익!


성나린이 방패를 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쓰러졌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오크들이 쓰러진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쓰러진 그녀의 하늘이 도끼날로 가득 덮였다.


눈을 감은 채로, 그녀는 손에 꽉 쥔 방패와 칼을 마구 휘둘렀다.

오크 한 마리가 칼을 맞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힘을 짜내 자리에서 일어선 성나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일격으로 날려버린 오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때.

그녀의 뒤에 있던 오크 돌격병이 광란 상태에 돌입하며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챙!


오크의 도끼는 그녀의 롱소드에 걸렸지만,

그녀의 작은 체구는 돌진해 온 오크 돌격병의 묵직한 질량과 함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졌다.

붉은 거품이 부글거리는 마그마 호수를 향해, 그녀의 날렵한 몸이 까마득하게 사라져갔다.


“나린아! 성나린!”


추락하는 성나린을 향해 길수연이 팔을 내밀었지만, 이미 그녀는 낭떠러지의 반이 넘는 거리를 떨어지고 있었다.


성나린.png 성나린


***


최아람이 뒤에서 길수연을 붙잡고 다리 난간에서 떨어졌다.

공격대원들은 분노와 슬픔으로 불타오르며 남은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크 돌격병들이 하나둘 다 쓰러지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오크 주술사에게 공격대원들의 칼날이 쏟아졌다.

오크 주술사가 쓰러지는 모습 뒤로, 한상태가 전력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얼음 화살에 식었던 화염 오라가 다시 살아나 기세등등해진 화염 정령이 뒤를 쫓고 있었다.


이준기가 강화 국궁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활시위에 얼음 화살을 걸면서, 소현배와 문아린에게 소리쳤다.

“얼음 화살!”


다시 불타오르는 화염 정령의 화염 오라를 쳐다보면서, 둘은 얼음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얼음 화살 세 개가 거대한 화염 정령을 향해 날아갔다.

화염 정령의 불타는 오라가 피식거리며 잦아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은 상황.

얼음 화살 개수를 세고 있던 이준기가 외쳤다.

“하나 더! 문아린 님 화살 하나 남았죠?”


“네.”

그렇게 대답하면서 문아린이 활시위에 얼음 화살을 걸었다.

3 층 건물 높이인 화염 정령을 향해 얼음 화살이 높은 궤적을 그리고 날아갔다.


피시시시…


화염 정령을 열 마리째 잡는 공격대원들이다.

이제는 화염 오라가 꺼진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일제히 화염 정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아.”

십여 분의 긴 전투를 끝낸 공격대원들이 저마다 한숨을 쉬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준기는 터진 물풍선처럼 바닥에 퍼져 버 화염 정령의 잔해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룻에 미친 사람처럼 잔해를 뒤졌다.


- ‘되살아난 화염의 핵’

- 희귀 등급.

- 오크 주술사들이 최고 등급 주술에 사용하는 재료입니다.


“오크 주술사들이 사용하는 거라고? 그럼 이걸 주워서 뭐 하게?”

상태창에 뜬 루팅 메시지를 본 한상태가 물었다.


“오크 전쟁기지에서, 최종 보스를 잡을 때 필요합니다. 챙겨두세요.”

이준기는 ‘되살아난 화염의 핵’을 한상태에게 넘겼다.


이제 "같아요"라는 표현도 없이 마구 정보를 던지는 이준기.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아무도 그걸 묻지는 않았다.

하나하나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을, 이상한 녀석이라고, 한상태는 생각했다.


박충기가 비통한 표정으로 공격대원들에게 말했다.

"성나린 님이 사망...했습니다."


지옥불 호수로 빨려 들어가 사망한 그녀의 시신은 수습할 수도 없다.

정신줄 놓고 댐딜하다가 오크 무더기를 애드시킨 장혁수를 향한 분노가, 공격대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박충기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남들이 분노하는 걸 느끼는 수준을 지나, 그도 장혁수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길드 스폰서가 사람 목숨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없는 분노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잠시, 성나린 탱커의 희생을 기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한상태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원자란, 원래 그런 직업입니다."


모두 눈을 감고, 죽어간 동료를 추모했다.

장혁수가 미운 만큼, 공격자들은 구원자라는 직업 자체가 가진 근본적인 성격, 언제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전율했다.


***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30. 화염 정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