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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Dec 16. 2024

기차에서, 칸트와의 대화

[책을 읽고] 김혜숙, <인식의 대전환> (1)

인식론 슈퍼스타, 칸트


기차나 비행기 안에서는 왠지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책 여러 권을 들고 탔다가 한 권도 못 읽고 내리며 자책한 적도 있고, 책 한 권만 들고 탔다가 후회한 적도 있다. 이번에는 왕복 네 시간 가량 기차를 탈 일이 생겨서 칸트를 들고 탔다. 한 권만 들고 타면서 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칸트가 날 실망시킬 일은 당연히 없을 것이고, 칸트는 쉽지 않으니 시간이 남을 일도 절대 없을 것이었다.


나는 철학이 궁극의 지적 유희라고 생각하며, 세부 분야로 들어가면 최애 장르는 단연 인식론이다.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인식론에서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주의 참 모습을 궁금해 한 여러 철학자들도 있으나, 질문의 심오함은 역시 파르메니데스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따라서 변하는 것은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는 어쩌면 파르메니데스의 반복에 불과하다.


파르메니데스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저작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인식론의 문제를 제대로 파헤친 첫 주자는 데카르트인 듯하다. 유명한 그의 명제, cogito ergo sum은 일견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뭔가 헛점이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 자체에 이미 '나는 존재한다'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이 명제가 잘못되었다고 공격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는) 사실은 동어반복이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즉각적으로 존재를 단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 A355, <인식의 대전환> 284쪽에서 재인용)    



논리실증주의와 잔여물


인식론의 질문은 결국 무엇이 진실인가로 귀결된다. 우리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수많은 천재 철학자들을 괴롭혀 온 이 질문에 대해, 20대 초반의 비트겐슈타인은 석사 논문을 통해 간단하게 대답한다.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 그만이다. 그게 진리다.


노년의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누가 그걸 모르나? 있는 그대로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진짜 질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이 유명한 석사 논문은, 입장만 발표하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정치인의 기자회견과 비슷하다.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계를 떠나 목수로 일했다. 물의를 빚고 은퇴를 발표한 수많은 연예인들처럼, 그는 나중에 철학계로 돌아왔다.


비트겐슈타인은 석사 논문 하나만으로 수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석사 논문 하나로 자신들의 입장을 방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곧 알아챘고, 이런저런 책들을 써냈다. 나는 A. J. 에이어의 <언어, 진리, 논리>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종합 입장서, 말하자면 매니페스토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소위 '공리'들을 충실하게 해설했다. 그리고 대망의 제7장에서, 유아론이라는 대악마와 싸우겠다는 패기를 부렸다. 


그의 논리는 나를 실망시켰다. 간단히 말해, 유추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가 대니얼 데닛의 지향성 개념이라도 전개했다면, 나는 (내가 지금 대니얼 데닛에게 그렇듯) 실망 대신 경의를 느꼈을 것이다.


알프레드 줄스 에이어


에이어의 책은 대단하다. 그 책을 읽을 당시 내가 느꼈던 상쾌함을 지금도 기억한다. 출간 당시 이 책을 읽고 마음속의 안개가 가시는 느낌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감사를 느꼈을 것이다. 주희가 공자, 왕필이 노자에 대해서 했던 역할을,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는 에이어가 해냈다.


논리실증주의는 일상생활의 경험과 잘 맞아 떨어진다는 점, 이해하기 쉽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인식론적 고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대단하지만, 아주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식론이라 하기에 너무 가벼웠다. 수많은 선배 철학자들의 고민을 단지 언어 오용에 따른 착각이라 치부하는 것은 과연 비트겐슈타인이 어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젊은 비트겐슈타인을 가장 혹독하게 비판한 것은 다름 아닌 늙은 비트겐슈타인이었다.


노년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골몰했고, 인식론을 더욱 철저하게 파헤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이 되었다. 그 정점에 선 것은 아마도 후설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 하이데거는 인식론을 끝까지 파헤치다가 실존주의라는 신대륙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인식론의 짧은 역사에서 빠진 중요한 인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칸트다.


좋은 책을 읽을 기회를 주신 21세기북스에 감사한다


***계속***


***증정 받아 읽었습니다만, 찾아서라도 읽었을 책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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