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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lelife Jul 26. 2024

진짜 공부와 가짜 공부

위정 17, 선진 11, 헌문24

 1. 흔들리는 나이, 불혹(不惑)       

            


논어를 읽다 보면, 공자가 마흔에 '불혹(不惑)'을 했다고 말하는 장면과 만날 수 있습니다. '불혹(不惑)'의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미혹됨이 없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헷갈리지 않는 것', 혹은 '의심하지 않는 것'이지요. 즉 다시 말하면 '자기 확신'입니다. 무엇에 대한 확신인가는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마흔 정도 되면 삶의 어떤 부분에서라도 확신을 가질만한 경험과 지식을 가질정도가 된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어느새 불혹, 그 미혹됨이 없다는 마흔이라는 나이를 훌쩍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혹되고 미혹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헷갈리고, 고민하다가 헛발질을 하고 지름길을 버려두고 뱅뱅 돌아가는 길을 택해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학생의 삶을 지향합니다. 무엇인가를 더 배워야 더 미혹되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말이지요.


그러나 나이들어 하는 공부가 쉽지는 않습니다. 더더욱 공부에만 신경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으니, 마음만 서둘고 정확히 해내는 것은 하나 없는 형편입니다. 실력이 늘기를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요, 제자리 걸음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공부 기간이 오래 되니 아집만 생겨납니다.


스스로 이 정도는 잘 안다 생각하고 넘어갔다가 쉬운 구문의 해석을 왕창 틀리는 경우도 많지요. 이런 경우에는 스스로 얼마나 창피스러운 지 모릅니다. 공부에서 느끼는 좌절이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닐진대, 막상 공부로 인해 좌절을 느끼는 순간이면 세상에 바보는 나뿐인 것만 같아 슬프기까지 합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어느 날, 아이가 문제집을 풀고 나서 채점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어떤 것은 본인이 알고 있었는데 문제를 잘못 읽었으니 맞은 것이라며 동그라미를 치고, 어떤 것은 계산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맞았을 것이라며 동그라미를 칩니다. 


이런 아이의 모습을 보니,  논어를 처음 배울 당시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그 때의 저는 정해진 분량의 공부를 다 해간 것 처럼 포장하는데 급급했었습니다.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학우들에게 잘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했던 것이 바로 '아는 척' 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는 척'이란 아마 안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를 손쉽게 장악합니다. 그리고 아마 이천년 전에도 이런 이가 있었겠지요. 바로 공자 시대에 말이에요.



2.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용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을 가르쳐주겠다.

알고 있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위정(爲政) 17-





'유(由)'는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인 '자로'의 이름입니다. 자로는 논어에서 수레와 가죽 옷을 친구와 나누어 사용하다가 부서지고 헤지더라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며 장담했던 캐릭터 입니다. 지금 시대와 비교하면 수레는 고가의 자동차, 가죽옷은 비싼 명품옷에 빗댈 수 있을 것같습니다. 용맹하고 씩씩한 이런 자로에게, 선생님이었던 공자가 해준 조언은 이렇습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



이 말을 통해 보면, 자로는 허세가 어느 정도 있었던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는 것은 물론이고, 모르는 것도 안다고 나서는 그런 허세 말이지요. '안다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는 지침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 단순하고 쉬운 말을, 제대로 지키는 순간들이 얼마나 될까요?





3. 아는 척은 불안에서 시작된다.



스물 다섯 살 때, 논어를 배우기 위해 야간 수업을 받았습니다. 수업 방식은 주로 발표수업이었습니다. 진도표를 참고해서 그 시간에 읽을 내용을 예습한 뒤, 수업 시간에 읽고 해석합니다. 발표자는 선생님께서 지정해주시지요. 


그런데 한문을 예습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한자도 거의 모르는 얕은 실력으로 공부하다보니 하루 종일 매달려도 예습 분량이 한 페이지도 되지 않았습니다. 한 문장만을 가지고서 하루 종일을 고민하는 날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습해가야할 분량은 매번 스무페이지가 넘었으니, 정직하게 공부하여 일주일 안에 해당 분량을 모두 예습해 간다는 것은 제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모든 분량의 예습을 완료해 간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분량의 앞 부분 서너장만 겨우 예습하고서 수업에 참여했지요. 그렇게 수업 시간에 앉아있으면 불안이 엄습합니다. 선생님께서 앞 부분 발표를 시키면 다행인데, 뒷부분의 해석을 시키면 벙어리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을 맞이해야했으니까요. 


그렇다고 매번 '예습을 못해왔습니다'라는 말을 하기엔 염치가 없었습니다. 저는 현실과 쉽게 타협하기 위해 '논어 해석본'을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논어 원문 책을 책상 위에 두고, 그 책 아래엔 나만 잘 보이게끔 논어 해석본도 깔아둡니다. 혹시나 나를 지정하여 시키신다면 해석본을 읽을 요량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해석본을 읽고 있으면 선생님께서는 바로 알아채십니다. 그 자리에서 핀잔을 듣기 일쑤였지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해석본의 유혹, 그리하여 저는 핀잔을 들어도 매번 해석본을 책상에 깔아두었습니다.


그러다 만났던 이 한 문장은 제게 일침을 가했습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하라!'


이 말에 저의 양심이 얼마나 찔리던지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나만 이렇게 '~척' 하는 것은 아니구나, 그 옛날 공자의 제자도 이렇게 살았었구나 싶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요. 한문 앞에 서면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았던 그 시절에 그 문장은 그렇게 제게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당장 마음에 담아 실천하기에는 제 그릇이 너무나 작았습니다. 그리고 두려웠습니다. 내가 수업을 듣는 사람들 중 가장 공부를 못하는 사람처럼 보일까봐서요. 열심히 공부했던 내 시간들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는 커녕, 남에게 뒤쳐져 보일까 걱정하는 불안감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이렇게 아는 척을 하며 저는 더욱 큰 것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이십 대 청춘에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이라면 나 자신을 칭찬해 줄 수 있을 텐데, 당시의 저는 나를 몰아치고 자책하기만 했습니다. 당시 저는, 어떻게든 논어 예습을 완벽히 해보려고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습니다. 학교 도서관에 앉아 논어를 붙들고 있다가 학교 수업을 듣고, 다시 도서관을 돌아와 밤 12시까지 논어를 손에서 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주일간 이렇게 애를 써도 예정된 분량을 모두 공부하지 못하고 수업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도 정작 논어 수업에 해석본을 참고하는 내가 비참하고 서글펐습니다. 발표 지명을 받을까봐 한없이 불안했습니다. 내가 나에게 실망하는 기간이 길어지며 결국 우울감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4. '아는 척'은 성장의 기회를 빼앗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께 내 상황을 솔직히 말씀드리고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조언을 구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선배로서, 스승님으로서 한없이 좋으셨던 분이셨는데,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단 한번도 그렇게 상담을 청해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고 저는 제풀에 지쳐 한문 공부를 한 동안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고 일갈했던 그 문장은 실천하지 못한 채 내 마음 안에만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천년 전, 최고의 지성이었던 공자는 오히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공자가 '모른다'고 말하는 부분이 실망스럽기는커녕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자로가 공자께 '귀신을 모시는 것'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공자가 답합니다.

"아직 사람 섬기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데, 내가 귀신 섬기는 것을 어떻게 알겠느냐?"

그러자 자로가 또 묻습니다. 

죽음에 대해 감히 묻는다고 말이지요.

그러자 공자가 또 대답합니다.

"삶도 아직 제대로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논어 선진 11>)


-선진(先進) 11-


또 자로와 공자의 대화입니다. 자로의 질문에 공자는 못하는 것은 못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당시 중국 땅에서 매우 이름난 스승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아는 척 해도 다들 그런 줄 알고 따를 텐데도, 거짓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공부를 이제 막 시작한 나와 같은 이도 아는 척 하기 바빴는데도 말이지요. 지금 돌이켜보니 공자와 비교해 저의 모습이 더욱더 부끄럽게 보입니다.


사실, 이렇게 아는 척을 하다보면, 그 결과는 하나로 귀결될 뿐입니다. 배움의 기회를 잃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지요. 내가 모르는 것도 아는척 하게 되면 나는 그만큼 배움의 기회를 잃게 됩니다. 배움의 기회를 잃게 되면 내 성장은 또 그만큼 더뎌집니다. 저는 당시 논어 수업을 열심으로 다녔지만 1년이 지나도 저는 무슨 내용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용이 있다면, 모르는 것을 밝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주변의 여러 자원을 활용하여 알기 위해 애써야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앎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공자의 꾸밈없는 '모른다'라는 말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과 겹치며 더욱 멋있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더 잘 살아가는 일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순간순간, 자신의 소명을 실천해야하는 존재입니다. 이를 위해서 '나'는 꾸준히 성장해야합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5. 남을 위한 공부가 아닌, 나를 위한 공부 하기



'아는 척'은 우리가 계면쩍을 때, 귀찮을 때, 쉽게 넘어가고 싶을 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에서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아는 척'을 방지하기 위한 프레임이라고나 할까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공부하는 이들은 자기를 위해 공부하였는데,

요즘에 공부하는 이들은 남을 위해 공부하는 구나."


子曰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는 爲人.


-헌문(憲問) 24-



처음 논어를 공부할 때 이 문장은 참으로 익히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나의 고정관념에 비추어 보면, '나를 위해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공부한다는 의미이고, '남을 위해 공부한다'는 것은 남에게 헌신하고 공부의 결과를 나누는 것이라고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 문장의 맥락에서는 전혀 다르게 해석해야합니다. 공자가 말한 '자기를 위한 공부(위기지학)'이란 '나의 성장이 목적이 되는 공부'이며, '남을 위한 공부(위인지학)'이란 남의 눈에 보이기 위한 공부입니다. 


학교 교육과정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나의 성장을 위한 공부'라는 말은 매우 생소했습니다. 성장이란 몸에만 적용할 수 있는 단어라고만 생각해왔습니다. '성장을 위한 공부'라는 프레임은 삼십대가 되어서 자기계발 분야의 책에 흥미를 가진 뒤에야 제게 익숙한 개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옛날에 자신의 성장을 위한 공부에 대한 개념을 제시한 공자의 시각은 매우 탁월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이제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확실히 밝힐 줄 알아야합니다. 이는 마음가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장을 추구하는 자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마음가짐에는 허영이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그 공부는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닌 남을 위한 공부가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나 공부의 내실보다는 공부의 외부적 결과 만을 중시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저는 아직 공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는지, 불혹의 나이이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매일의 내 모습이 곧 바로 나의 삶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리고 '불안'에 대한 경계입니다. 


20대와 30대에 '불안'은 친구처럼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불안을 놓아주기 보다는 붙잡아두려고도 했습니다. 불안해해야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심리 기제가 나를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남은 삶은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이야기 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더 이상 '~척' 하지 않고 솔직해지려는 용기, 그것을 더욱더 키워가기 위해 지금도 애쓰는 중입니다. 그것이 곧 '나의 성장을 위한 공부'의 첫걸음이리라 생각하며, 오늘도 한 걸음 내딛어 봅니다. 


-不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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