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위정 12, 대학장구 2
지금은 새벽 다섯 시 십 분입니다. 출근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딱 한 시간만 글을 써보자고 다짐한 지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다섯 시에 깨어나 한 시간씩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딱 일주일 째입니다.
잠을 이기지 못할 때면 소파에 등을 대고 앉아 떠올립니다. 한문공부를 하기 위해 추운 겨울, 새벽 네시에 등짐을 지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던 그 순간을요. 지금은 그래도 따뜻한 집, 푹신한 소파에 앉아있는 데다가 뜨신 차 한잔도 옆에서 대령 중이니 얼마나 편안하냐 스스로 달래보지요. 그래도 피곤을 이기지 못할 땐, 따뜻한 작두콩 차를 끓여 청자 컵에 담아 노트북 옆에 두고 홀짝 거리며 마십니다.
내 곁을 지키는 청자컵은 우리 집에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강진에 '고향사랑기부'를 하고 작년 겨울 끝자락에 집으로 청자 컵 한 쌍을 배달받았습니다. 영롱한 빛이 곱고 고와서 나와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 꽤 되었습니다. 이제는 청자컵 말고 다른 것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한 잔 물을 마실 때, 차를 끓여 마실 때,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이 컵이 아니면 안 됩니다. 청자 컵은 나의 요구에 따라서 이것도 담고 저것도 담으며 온갖 시중을 다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천후 청자컵을 보니 퍼뜩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子曰 "君子, 不器."
자왈 "군자, 불기."
- 논어 위정 12 -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는 표현들은 매우 많습니다. 사람의 재능이나 덕성을 그 자체로 '그릇'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요, '대기만성'이라는 사자성어나 '국량'이라는 단어도 익숙하지요. '부자의 그릇'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요즘에는 '부'를 다룰 수 있는 능력 또한 그릇에 빗대기도 합니다.
그런데, 위의 공자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가장 최고의 인격을 갖춘 사람인 '군자'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릇은 그 탄생 원인부터 사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용도에 맞게 쓰임과 용량이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공자는 군자에게 한 가지의 쓸모, 한 가지의 용량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자의 말들에 해설을 붙였던 '주희'라는 분도 이 문장에 대해 '몸체가 두루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 '두루 쓰이지 않음이 없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살았던 때에는 군주에게 등용되어야 쓰임을 받을 수 있었음을 감안하면, 능력과 덕량에 한계가 없어서 군주가 필요로 하는 일은 모두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군자가 아닐까? 이 문장을 처음 공부할 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남의 신하 노릇을 전천후로 잘하라고 당부하기 위해 위의 문장을 남겼을까?'
하고 말이에요. 임금이 원하는 군자가 아니라, 군자 스스로가 원하는 군자상. 그런 모습을 표현하는 문장이라면 어떤 의미를 가질까, 고민하게 된 것이지요. 이런 물음표를 지닌 채 한동안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계발 서적을 보는 중에 '안전지대를 넓혀라.'는 말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안전지대'란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야를 뜻합니다. '안전지대를 넓힌다'는 것은 내가 지식을 쌓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를 점점 더 넓히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새로운 분야에 대해 꾸준히 공부하여 낮은 상태의 한계치에 머무르지 말라는 조언이었습니다.
'그렇구나, 이 말이 그 말이로구나!'
저는 '안전지대'라는 단어에 무릎을 쳤습니다.
이미 성형된 그릇은 다시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존재, 더 이상 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크고 멋있게 만들어졌어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한계가 명확한 존재, 이것이 바로 그릇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자신이 배우고 익히고 노력하며 살아간다면 스스로의 성장 가능성은 무한대입니다. 오직 인간이기에 학습이 가능합니다. 학습은 어제의 나를 조금 더 발전시키고 변화시킵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에너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소멸로 향해갑니다. 그릇은 쓰다 보면 헐고 조금씩 금이 가다 깨지고 맙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배움을 통해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소멸로 직행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공자 선생님이 하신 말씀, '그릇이 되지 말아라.'라고 조언하신 것은 이런 말이 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용도에 맞게 제작된 그릇이 아니다. 자신에게 한계를 두지 말고 끝없이 성장하거라."
이 문장을 보고 처음 생각한 '군자'의 모습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능력이 출중하여 누군가를 잘 보필하는 사람이 아녔습니다. 남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성장시키는 사람, 즉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는 사람이 군자인 셈이지요.
탕임금의 세숫대야에 새겨진 말에 의하면,
"진실로 어느 날 새로워지거든, 매일 새롭게 하며, 또 날로 새롭게 하라." 하였다.
湯之盤銘 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지반명 왈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 대학장구 2장 -
<대학(大學)>이라는 고전을 보면, 위의 구절이 실려있습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고사성어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구절입니다. 이 문장도 공자 선생님의 말씀과 연결 지어 생각하면 이렇게도 바꾸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새로이 성장한 부분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이를 놓치지 말고 매일 성장하며 날마다 성장하여라."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막연했던 의미가 더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세숫대야란 매일 아침 마주하는 물건입니다. 그 옛날, '탕임금'이 성군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매일 세숫대야를 마주 대하며, 이 문장을 매일 보고 날마다 새롭게 성장하고자 했던 한 '군자'의 모습이 여기에서 상상되니까요.
우리는 날마다 어제의 나를 답습하며 살아갑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하는 생각의 수를 세어보면 5~6만 가지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오만가지생각'이라는 관습어가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제 했던 생각의 90프로 이상을 반복하는데, 그중 80프로 이상은 부정적인 생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합니다. 멘토와의 만남, 공부, 독서, 학습은 모두 이런 외부의 자극에 해당됩니다.
얼마 전엔 제 생일이었습니다. 어릴 때에는 늘어가는 케이크의 초가 뿌듯했습니다. 생일초가 20개가 채워지기만 간절히 바랐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케이크에 꽂힌 초가 하나씩 늘어가는 것이 부담이 됩니다. 그만큼 내 얼굴에 주름살 하나 더 늘고, 면역력은 떨어지는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올해는 케이크의 촛불을 끄며 유독 부끄러웠습니다. 뭐 하나 이루어 놓은 것 없이 또 한 살을 먹는다는 생각에 두렵고 서글펐습니다.
그러나 내년엔 하루하루 매일 성장하여 결국 일 년 간, 한 뼘 더 성장한 내 모습에 으쓱해하며 촛불을 끄고 싶습니다. 스스로에게 한계를 두지 말고 매일 성장하고 끝없이 성장하기를 바랐던 공자선생님의 조언을 실천해보고 싶습니다. 날마다 성장하는 내 모습을 실천해 나가면, 매년 케이크에 초가 하나씩 늘어갈지라도 자신감 있게 촛불을 향해 '후!'하고 입김을 불어댈 수 있겠지요.
아, 피곤하지만 오늘도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성장'을 간절히 바라는 내 마음 때문입니다. 이미 그릇으로 존재하는 내 친구 '청자컵'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은, 내가 '그릇이 되지 않기 위한' 7일째 실천의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