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연 4장, 술이3장, 술이 37장
잠드는 것을 두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눈만 감으면 거의 매일 악몽만 꾸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소원했던 한문 공부를 중도에 그만 두고, 원치 않았던 직장으로 복귀하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새로 이사간 집터가 나와 맞지 않았던 것일까요? 휴식을 취해야할 밤에도 악몽 때문에 잠을 설치느라 항상 피곤했습니다.
그러나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몽을 꾸고나면 꼭 현실에서도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진흙에 발이 빠지는 꿈을 꾸면 그 날부터 발에 염증이 생겨 병원에 가게 되거나, 대문에 구멍이 세 개 뚫리는 꿈을 꾼 날이면 직장에서 세 가지 문제가 연거푸 터지며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는 등의 일들이 일어났지요.
처음엔, 이것이 예지몽인가 싶어 내심 반가웠습니다. 그 때의 나는 미래를 미리 알고 싶어 견딜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다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지 꿈이 알려줄것만 같았습니다. 혹여나 이 '유형(遊刑)'같은 기간이 언제 끝날 지 기한이라도 알 수 있다면, 즐겁게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내 꿈은 매일 악몽만을 전할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꿈이 무엇인가를 암시했다고해서 미리 현실을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닌지라 답답했습니다. 꿈에서 보았던 광경들은 상징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 지, 실제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꿈에서 깨도 악몽 속을 떠도는 기분이었습니다. 불안한 하루하루가 지속되며 정신적인 긴장감도 최고조로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미래를 알게 된다는 것, 특히 좋지 않은 미래를 미리 알게 된다는 것은 내 삶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악몽을 꾸며 부정적인 생각으로 하루를 살고, 그럴수록 악몽은 더 심해졌습니다. 더 이상 꿈을 꾸고 싶지 않았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꿈꾸지 않기 위해 수면 시간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밤 늦도록 텔레비전을 보고, 인터넷 검색으로 시간을 떼우다 쓰러지듯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잠과 싸우던 어느 날, 피곤에 지쳐 집안 여기 저기를 멍하게 둘러보다가 우연히 책장에 꽂힌 논어를 발견했습니다. 한문 공부를 그만두게 되면서 애써 피하고 있었던, 바로 그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생각할 겨를 없이 내 손이 먼저 나아갔습니다. 어느 순간, 내 두손은 검은색 양장의 묵직한 논어책을 펴들고 있었습니다.
한문을 업으로 삼기 위해, 그 동안 수없이 되뇌고 외우던 논어였고 그만큼 친숙하다고 생각했던 논어였습니다. 그런데 불면의 밤을 보내던 그 날의 논어는 내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과실의 껍질만 반복해서 닦아내었다면, 그 불면의 밤엔 치아로 껍질을 깨물어 아주 조금이나마 과즙을 맛본 것과 같았습니다.
논어를 통해 느끼는 절실한 감각이 나를 전율케했습니다. 불안으로 항상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던 일상을 보내던 나날들을 통과하며, 그렇게 나는 논어를 새롭게 파고들게 되었습니다.
사마우(司馬牛)가 '군자(君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공자가 답하였다.
"군자는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곧 군자입니까?"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잘못이 없는데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랴."
司馬牛問君子, 子曰 "君子 不憂不懼."
曰 "不憂不懼, 斯謂之君子矣乎?"
子曰 "內省不疚, 夫何憂何懼!"
-안연(顔淵) 4장-
위 대화에서 나오는 사마우는 송나라 출신으로 공자의 제자입니다. 대화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사마우는 상당한 불안과 걱정에 시달리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주희도 이 구절에 집주를 달아,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적어두었습니다.
집주에는 당시 사마우의 형은 송나라 대부 '사마환퇴'라는 인물에 대해 기술합니다. 사마환퇴(司馬向魋)는 공자를 죽이려고 한 적이 있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 난폭한 성향이었던 듯 합니다. 그런 그가 '난(亂)'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난리(亂)'라고 하면 주로 하극상을 이릅니다. 즉, 사마우는 형의 행실로 인해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울까 염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우가 '군자'라는 이상적 인간상에 대해 묻자, 공자는 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라고요. 그것만 하면,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인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한 밤중 잠못들던 저는 근심과 걱정에 찌든 사마우의 모습 속에서 나와 닮은 꼴을 발견하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높아보이는 공자의 제자들도 두려움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내게 안도감을 선사했습니다. 두려워 떠는 제자를 다독여주는 공자의 자상한 말이 나를 향한 듯 마음 한 구석에 온기가 스며들었습니다. 마치, '너는 다 잘 하고 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자'란, 두려움 없는 사람이란 역시 평범한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을 없앤다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런데 공자의 말들을 자세히 뜯어 보니, 공자는 '두려움을 없애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사마우의 두려움이 올바른 방향을 찾도록 하는 말일 뿐이었습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들 합니다. 감정이란 인간을 지배하는 하나의 커다란 에너지라는 말과 다름아닙니다. 감정이라는 에너지는 우리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고, 상승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려움은 우리의 삶을 가장 격렬하게 이끌어가는 감정입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잘못한 것이 없으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공자의 말은 두려워해야할 대상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다만, 그 두려움의 대상이 외부의 상황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바르지 못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대상을 외부상황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향하게 하는 것, 이렇게 두려움의 대상을 전환하라는 공자의 말을 듣고 사마우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항상 형때문에 일이 잘못되어 자기에게까지 어려움이 올까봐 걱정했던 사마우는, 두려움의 대상이 곧 외부에 있었습니다. 저 또한 항상 현실에서 내게 가해질 운나쁜 일들을 걱정하며 살고 있었지요.
그런데, 논어의 다른 구절을 살펴보면 공자도 근심 걱정하는 것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공자가 걱정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논어의 <술이>편에는 공자가 진심으로 걱정거리로 여겼던 항목들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덕을 닦지 않는 것과
배운 것을 강론하지 않는 것과
의로운 것을 들으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과
좋지 않은 점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근심이다."
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술이(述而) 3장-
위의 글을 읽어보면, 공자가 걱정하는 것들은 이렇습니다. 마음 수양, 학습의 정진, 옳은 일의 실천, 잘못의 개선. 이 네 가지가 공자의 걱정과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위에서 나온 공자의 말과 통합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마음과 지혜와 말과 행동이라는, 내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길가다가 내 머리 위로 갑자기 떨어지는 새똥이나 돌진해 오는 자전거를 미처 피하지 못하는 일들은 내가 예상할 수 없고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심하게 걱정하고 두려워한들 스스로 막을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공자는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최대한 바르게 행동하기를 권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바르지 않아 생긴 결과는 책임을 지고, 그 외에 통제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사건들은 걱정해봤자 달라질 것이 없으니 고민하지 말라고는 것이지요.
저처럼, 매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까 걱정하는 사람은 하루를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발목잡혀 마음과 몸의 에너지를 소진할 뿐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대로, 나 자신의 마음과 지혜를 가꾸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살아간다면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오히려 생산적인 에너지로 전환되어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군자는 항상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고 소인은 지속적으로 근심걱정한다.
子曰 君子坦蕩蕩하고 小人長戚戚이니라
-논어 술이(述而) 37-
군자는 항상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상황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내가 여러 면에서 잘 성장하고 있다면 또 걱정할 것이 없으니 세상을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요.
저는 역시 항상 근심하는 소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니 나는 자기에 대한 연민과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해보려고 하지 않은 채, 그저 누군가가 나를 끌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저 상황이 바뀌어 내가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누군가가 내게 먼저 다가와 공부를 도와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나를 바꾸지 않고 외부의 조력으로 상황이 바뀌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더욱 어리석었던 것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으면서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악몽을 꾸었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내게 드러날 나쁜 일들을 기다려며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이렇게 매일을 살아가고 있으니 좋은 일이 일어날 턱이 없었지요.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수렁속으로만 빠져드는 기분은,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논어를 읽으며 절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외부에서 나를 충족시켜주기를 원하는 무기력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두손 놓고서 두려움 속에서 허우적대며 익사직전이었던 어느 날, 논어 한 문장이 내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따끔히 한마디 합니다.
"두려움을 느끼는구나. 그렇다면 지금 네 자신을 돌아봐.
그리고 네가 지금 할 수 있을 것을 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밀려올 때 나 자신부터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힘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껴안고서 스스로 한 발자국 더 내딛는 충실함을 가리킵니다.
지금 저도 공자의 말처럼 해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라 잘 되지는 않습니다. 걱정만 하고 살아가는 소인의 삶을 이어가다가 여전히 바닥을 치고 힘들어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다시 세워주는 공자의 말이 곁에 있기에 가끔씩 논어를 들여다보며 힘을 냅니다.
그래서, 지금은 악몽을 꾸지 않느냐고요? 아닙니다. 여전히 악몽은 꿉니다. 다만,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다보니 악몽을 꾸는 빈도가 조금 줄었습니다. 또 악몽을 꾸더라도 개의치않으려 합니다. 악몽을 염두에 두지 않으니 하루가 더 수월히 넘어가고, 그럴수록 악몽을 꾸는 횟수도 줄어드는 기분입니다.
그러나 사실, 지금도 불안은 여전히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이 맞는 지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없이 불안을 느끼면서, 한편 이것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것이 곧 삶이겠지요.
십대에 접어든 우리 아이들도 전보다 불안감도 높아지고 걱정거리도 많아졌습니다. 초등학생 때와는 달리, 얼굴에 난 여드름과 몸매 걱정에 매일 거울을 들여다 보고 친구들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엄마와 아빠의 말과 행동도 예민하게 굽니다.
여유로운 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옛 사람들의 불안과 지혜에 대하여, 엄마가 겪고 있는 소인(小人)과 같은 삶과 조금씩 해나가는 노력에 대하여 말입니다. 옛사람의 지혜와 서로의 경험이, 우리 아이들 뿐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을 겪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不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