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연(顔淵) 12장
대여섯 살 즈음이었을까요. 어느 깊은 새벽이었습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문득 잠에서 깨어 눈을 반짝 떴습니다. 밤잠을 깊게 자던 어린 시절이라, 한밤중에 갑자기 눈이 떠진 이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부모님과 동생 모두 내 곁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다시 잠을 자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나의 곁에 가족들이 있는데도, 그들은 제각기 자기만의 세계 속에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나의 존재를 자각해주지 않는 이 순간엔, 오롯이 나 혼자였던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나와 내가 마주친 순간, 홀로 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혹감과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결국 공포를 이겨내고 스스로 잠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 만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나의 부모님이 아무리 날 사랑하더라도, 낮동안 즐겁게 놀아준 남동생이라고 해도, 결국은 '타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낯선 밤의 세계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을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마음을 달래 가며 한동안 멀뚱히 맞은편 벽과 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때마침, 어둔 방 천장에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쳐 들었습니다.
불빛은 유리창을 투과하여 들어와 천장과 벽면에 주홍빛 무늬를 그려냈습니다. 자동차의 이동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불빛은 불투명한 유리창을 투과하여 기하학적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동그라미 속에 마름모 꼴이 곱게 들어간 빛나는 무늬들이 천장을 타고 벽을 타고 내려가다 사라졌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어린 나는 한동안 홀리듯 그 모양을 바라보며 두려움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주홍빛 불빛은 내게 따스함을 전해주었고, 나는 불빛을 위안 삼아 조금씩 잠이 들 수 있었지요.
가끔, 살아간다는 것은 '홀로 견디는 것'이라는 것을 느낄 때, 어린 시절 한밤중 깨어 바라보았던 그 불빛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한평생 대면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삽니다. 개학 전날 하나도 해놓지 않은 방학숙제를 바라보는 느낌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무겁게 느껴지는 숙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숙명을 비켜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홀로'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나에게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잘 지내면 지낼수록, 삶의 순간들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어린 날 밤에 보았던 그 아름다운 무늬처럼 말입니다.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였다.
"나 자신을 이겨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것이다."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안연문인, 자왈 "극기복례위인,
一日克己復禮, 天下 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일일극기복례, 천하 귀인언, 위인유기, 이유인호재."
<안연(顔淵) 12장>
공자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품성을 '인(仁)'이라는 말로 규정했습니다. 논어에서는 '인(仁)'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알 수 없는 것이 '인(仁)'입니다.
안연도 '인(仁)'이 무엇인지 궁금했나 봅니다. 안연의 질문에,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통해 '인(仁)'을 행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이 유명한 말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사적인 욕심을 이겨내어 예를 회복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욕심을 억눌러 타인에게 예절을 지키는 것, 이것이 제가 이해했던 '극기복례'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만난 '극기복례'라는 단어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날은 한참 내가 나에게 실망스러웠던 밤이었습니다. 그날도 먹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던 야식을 배부르게 먹고는 배가 아파 잠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잠 못 드는 밤, 우연히 논어를 읽다가 보게 된 '극기복례'라는 단어가 내 안에서 생생하게 약동하며 내게 이렇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극기복례는 남을 위한 것만이 아니야! 너 자신에게 먼저 적용시켜 봐!"
라고 말이지요.
야식을 먹고 배가 아파 식은땀을 흘릴 때가 되어야 자책하는 사람, 내내 일을 미루고는 업무 기한을 맞추기 위해 밤새워 일하다 짜증이 폭발할 때즈음이 되어야 후회를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이렇게 몸이 괴로울 때에야 비로소 나는 깨닫습니다. 아, 나를 가장 괴롭히는 이는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克己復禮(극기복례)' 중에서 '克己(극기)'라는 말은, '이길(극), 몸(기)'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한문 문장에서 '몸(기)'라는 글자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요. 그래서 '극기'는 '나를 이긴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그 밤에 만났던 '극기'는 나를 한참동안 꾸짖었습니다.
"이거 봐. 넌 오늘도 네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야식을 먹었지. 그런데 야식은 진정 네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 그저 탄수화물 섭취를 통한 도파민 자극을 원했던 것뿐이지. 네가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은 건강과 질 좋은 수면이야. 그런데 지금 너는 그 한순간을 못참아서 진정 원하는 것을 못하게 되었어. 봐, 지금 너의 모습을."
한동안 '극기복례'라는 단어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논어를 공부하며 이 대목을 수차례 외웠던 나였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나 자신에게 실천해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을까요?
지금까지 나는 '극기복례'는 오로지 남을 대할 때 행하는 예절이라 생각했습니다. 내 상황이 되지 않아도, 무리해서라도 남에게만 맞추어 주던 지난날 나의 행동들이 참으로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리하자면, 내가 그날 깨달은 '극기'는 자신의 말초적 욕구를 이겨내는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된 욕구로 따르지 않는 것, 도파민의 자극을 추구하지 않도록 단호히 행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극기입니다.
야식을 먹으면 배가 아프다는 것을 잊지 않고 야식을 절제할 수 있어야합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SNS 앱을 열었다면, 내게 유익한 정보만 얻고 SNS 앱을 끌 줄 알아야합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놀고 싶은 마음을 조절해 가며 조금씩이라도 일을 해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극기'인 것입니다.
'극기'와 만나보았으니, 이제 '복례(復禮)'의 차례입니다. '복례'란 '되돌릴 복(復)'과 '예절 예(禮)' 두 글자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먼저 '복례'의 '복'이라는 글자를 짚어 보겠습니다. 이 글자는'되돌릴 복(復)', 즉 다시 되찾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원래 있던 것이 없어졌다가 다시 원형을 되찾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원래부터 나 자신에게 예를 지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갓난 아이들은 놀랄 정도로 자신의 욕구를 정직하게 알아챕니다. 배가 고플 땐 우유를 먹으면 울음을 그치고, 기저귀가 불편할 때에는 기저귀를 갈아주면 됩니다. 그러나 조금 자라 감정이 분화되고 원하는 것도 다양해지면서 자기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 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복례'입니다. 나에 대해 잘 알아서, 올바른 방법으로 편안한 상태로 나 자신이 존재할 수 있도록 존중하는 것이 '복례'인 것입니다.
'예(禮)'라는 글자는 어떨까요? 예의 정신은 존중입니다. 처음 만나는 누군가와 친해질 때, 우리는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가려 애씁니다. 상대를 존중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배려해주기 위해서 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남을 위한 배려와 존중은 깊이 생각하고 자주 떠올립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에게는 어떨까요? 저만해도 나 자신을 잘 배려하지 못합니다. 나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나에 대해 모를까요?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하지 않으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작 알지 못합니다.
사실, 질문은 관심이자 관찰의 표현입니다. 내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질문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례'의 출발은 관심입니다. 내가 나에게 관심을 두고, 관찰하며 질문하면서 나를 알아가는 일, 그리고 이를 통해 내가 나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 이것이 곧 '복례'입니다.
초코맛 과자를 손으로 들기 전에, 내 몸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한 잔의 물인지, 따뜻한 한마디의 위로인지 자기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는 나. SNS에 빠져들기 전에, 내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쉼' 그 자체는 아닌지 돌아보는 나의 모습이, 나 자신에게 예의를 갖춘 나입니다. 이것이 내가 나에게 행하는 '극기복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극기복례'는 매우 어렵습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나는 '나에게 맞는 가장 올바르고도 편안한 상태'를 잊고 나 자신을 함부로 대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실천적인 조목으로 만들어본다면 어떨까요? '극기복례'를 수행하는 것이 조금 더 쉬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안연과 공자의 대화는 다시 이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사물장(四勿章)입니다. 이 사물장(四勿章)이 바로 실천 조목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안연이 말하였다.
"청컨대, 그 조목을 묻습니다."
공자가 대답하였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顔淵曰 "請問其目. "
안연왈 "청문기목."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자왈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비례물시(非禮勿視) : 예가 아니면 보지 않는다.
비례물청(非禮勿聽) : 예가 아니면 듣지 않는다.
비례물언(非禮勿言) : 예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비례물동(非禮勿動) :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다.
네 가지의 금지 조항, '사물(四勿)'은 '넷 사(四)'와 '말다 물(勿)'로 이루어졌습니다. '네 가지', 그리고 '~하지 말라'는 금지의 의미를 가진 한자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로, 위의 내용을 '사물장(四勿章)'이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지요. '사물(四勿)'은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는 네 가지 일을 예에 맞는 것만 하라고 말합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뉴스로 내 시야를 어지럽히면, 내 마음도 부정적인 색깔로 변합니다. 그리하여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시각적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 이것이 비례물시(非禮勿視)입니다. 남의 험담을 하는 자리에 나를 두지 않으면 내 마음도 불편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례물청(非禮勿聽)입니다.
'잘 해낼 거야.', '너는 참 예뻐.' 이렇듯 나 스스로에게 예의에 맞는 말, 격려하는 말, 사랑이 가득 담긴 말을을 해주는 것, 이것이 비례물언(非禮勿言)입니다.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나에게 밤에 함부로 야식을 권하지 않는 것, 이것이 비례물동(非禮勿動)입니다.
이렇게 '사물(四勿)'을 실천하여 '극기(克己)'를 이루고, '복례(復禮)'로 나아가는 것은 내가 나를 존중하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하고 예의를 지켜줄 때,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또한 소모되지 않고 '나 자신'을 당당히 지켜낼 수 있습니다.
예절이라는 것이 더 이상 남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一日克己復禮, 天下 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일일극기복례, 천하 귀인언, 위인유기, 이유인호재."
가장 처음 소개했던 문장으로 다시 돌아와봅니다.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위에서 해석하지 않은 문장을 이제야 해석하여 소개해봅니다. 이 부분을 가장 마지막에 소개하게 된 것은, [안연 12장]의 내용을 종합하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사랑하는 시간을 갖고 나를 돌보아야 한다고 말이지요. 나를 사랑하는 일을 실천하면 세상 모두가 사랑으로 물듭니다. 이렇게 사랑이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모두 예절에 맞는 것만 내게 해주며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 나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질문하기, 하루에 한 번 나를 사랑하는 시간을 갖기, 지금부터라도 실천에 옮겨 보면 어떨까요? 나로 인해 온 세상이 사랑에 물들 수 있도록 말이지요.
안연과 공자의 대화,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은 그 언어들에 오늘도 푹 빠져 살아갑니다. 논어의 말은 나를 향한 사랑이며 인간을 향한 깊은 애정이 담긴 말입니다. 먼저 세상을 살아본 인생 선배의 당부입니다.
'너 자신을 사랑해줘. 그것이 네가 너와 잘 지내는 방법이야. 온 세상을 사랑하는 길이야.'
이렇게 말하며 맛있는 떡볶이를 호호 불어 입에 넣어주며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공자의 모습이 마음 속에 그려집니다.
이제 더이상 나를 달래주던 어린 시절의 그 불빛은 필요치 않습니다. 더이상 나를 달래줄 무언가가 외부 세계에 있을 것이라고 여기며 고통스럽게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로 내 곁에 논어가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