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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lelife Aug 02. 2024

넘어야 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

논어 위정4, 옹야 12

1. 넘지 말아야 할 선



초등학교 1학년 때 골목놀이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즐겁게 남아있습니다. 가방을 집에 냅다 던져두고 골목으로 나가면, 골목에서 놀던 친구들, 언니와 오빠들이 아무 놀이에나 선선히 끼워주고는 했지요.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술래잡기 등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는 다 했습니다. 하루 종일 언니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골목길에서 노느라 정신이 없던 그 시절, 그러나 이렇게 즐겁게 놀면서 규칙에 대한 개념은 제대로 배워나갔던 듯 합니다.


고무줄놀이를 할 때에는 고무줄에 걸려 박자를 놓치면 다음 친구에게 차례를 넘거야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공기놀이를 할 때에는 일정한 수의 공기알을 받아내지 못하면 내 차례가 끝났음을 받아들여야 했지요. 골목길에서 사방치기 놀이를 할 때면 절대 선을 밟으면 안되었습니다. 금을 밟지 않고 잘 건너가는 것이 중요했지요. 놀이를 할 때 '선(線)'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언니들과 종이 인형을 할 때도 '선(線)'은 중요합니다. 내가 자른 종이 인형은 삐뚤빼뚤 잘려 항상 이뻐 보이지 않은 반면, 언니들이 잘라 놓은 종이 인형은 언제나 단정해 예뻐 보였지요.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조금 더 관찰하니 역시 '선(線)'이었습니다.


언니들은 종이인형의 선을 따라 정교하게 가위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잘라 놓은 종이 인형은 얼굴이 파이거나 팔이 잘리는 일 없이 항상 예뻤어요. 나는 항상 인쇄된 선을 넘어 종이인형의 머리카락이 파이거나 팔과 다리가 깎여 나가고 손가락은 잘리기도 했어요. 그것을 깨달은 뒤로는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선을 지켜 종이 인형을 자를 수 있게 되니, 어느새 저도 예쁜 종이 인형을 가질 수 있었지요. 그렇게, 자연스레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선(線)'은 학교의 교실 안에도 있었습니다. 학교 교실, 내 자리에 앉으면 책상 한 가운데에 선이 길게 그어져 있었거든요. 역사가 오래된 초등학교는 나무창틀에 나무 바닥, 책상도 짝꿍과 함께 쓰는 기다란 나무 책상이었습니다.  짝꿍이 된 남학생은 함께 앉게 된 첫 날, 책상 한가운데에 연필로 선을 힘차게 그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선을 넘지 말라고 당차게 경고했었지요.


인간관계에도 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짝꿍은 친절하게도, 책상에 선을 그어 눈으로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한 살씩 먹어갈 수록 보이지 않는 선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가면 마음이 불편한 일이 생긴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2. '열심히' 말고, '잘'하기




그런데 이렇게 넘지 않아야 할 선들을 너무 열심히 배운 까닭일까요? 어른이 된 지 한참이 지나서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선을 그으면 안되는 곳에 선을 긋고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예요. 바로, 나의 마음과 나의 성장판에 스스로 그은 선이었습니다. 아주 예전에 선생님이 내게 하신 한 마디 말이 계기가 되어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십여 년 전, 한참 한문 공부에 재미를 붙였을 때의 일입니다. 한문 읽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잠을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몰입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그 당시 스터디에 함께 참여했던 학우들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더욱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서도 무료로 공부를 봐주셨던 선생님들의 열정이 우리를 이끌었기 때문이었겠지요.


한문 책 한 권을 통독한 뒤, 다시 새로운 텍스트를 선정하여 공부를 시작할 즈음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전화를 걸어 앞으로 '사기열전'의 '항우본기'부터 읽어나갈 것이라고 안내하시고, 어떻게 공부를 해와야 할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자, 저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통화를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 말에 선생님께서는 전화를 끊지 않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열심히는 당연한 것이고, '잘'해야지요."


그 목소리엔 힘이 가득하여 나도 모르게 당황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모골이 송연해지며 불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지요. 선생님 말씀에 뭐라고 대답해야할 지 알지 못해, 저는 "네?"하고 되묻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심히 하는 건 누구나 다 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한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닙니다.

열심히 한다는 말로 스스로를 합리화하지 마세요.

결과 또한 잘 나올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끌어가는 것,

이것이 '열심히'하는 나에 대한 의무이자 예의입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통화를 마무리하셨지요. 통화를 끝내고 뒤, 저는 한참 멍하니 앉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의미의 층위를 생각해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선생님의 말씀은 내게 질책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실력이 없다는 건가? 공부를 못한다고 돌려 지적하는 건가?' 속으로 생각하며 한동안 울적했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한 몇 달 뒤에는 어쩔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한문 공부마저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해내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아쉽고, 많은 가르침을 받을 없는 현실에 피눈물이 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능력도 운도 그뿐인 데다 선생님이 인정하는 공부 잘하는 제자도 아니므로 어쩔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체념하며 몇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3. 선을 긋지 말아야할 곳도 있다.




수년이 지난 어느 날, 한문과 전혀 상관없는 직장을 다니며 한문과 멀어진 지도 한참이 지나있었습니다. 한문을 공부할 수 없는 허한 마음을 자기계발서적을 읽어가며 달래던 어느 날이었지요. 한 자기 계발 서적에서 '한계'에 대한 화제를 읽다보니, 문득 수년 전 통화 중에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데다가 여러 책들을 읽고난 뒤라, 나는 과거 그때의 나의 모습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천천히 복기해보니, 통화를 하던 그때, 나는 '열심히 하겠다'는 말에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대화를 마무리하기 위한 의례적인 대답이었습니다.


한문은 원래 어려운 것이니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곧 겸손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잘'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내 마음의 태도조차 잘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나'라는 사람을 정확히 간파하셨던 것이었어요.


선생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공부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의례적인 답변이었습니다. 그런 답변에도 선생님은 성장을 북돋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공부에 대한 제자의 정성이 선생님보다도 못한 상황이었음을 그제야 돌이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나를 위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고보니, 나를 질책하던 말이 아니라 나를 이끌어주셨던 말임을 수년이 지난 그때에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라는 제자의 의례적인 말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을 만큼, 선생님은 진심을 담아 나의 공부를 응원해주고 계셨던 것이었어요.


자연스레 그때의 나의 공부 상태를 돌이켜보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한문 공부에 진심으로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밥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한문을 열심히 읽다 보니, 문득 한문이 한글처럼 입에 붙는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읽히고, 읽는 순간 의미도 해석되는 기쁨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저는 한편 두려워졌습니다.


'내가 이렇게 빨리 공부 성과를 보일 리 없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마 잠깐일 뿐일 거야. 곧 예전처럼 버벅거리고 말겠지.'


그런데 이런 생각이 몇 번 스친 뒤로 한문을 읽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한문 문장에 집중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읽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실력이 향상되기는 커녕 다시 예전으로 후퇴하는 듯 했지요.


저의 이런 모습을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그제야 생각해보았습니다. 내 마음에 스스로 한계를 긋고 있다는 것을 선생님께서 느끼시고 하신 말씀이었던 것이에요. 저는 그 때 당시, 끝내 마음의 한계를 넘지 못하여 그 이상의 성취를 하지 못했습니다. 몇 달 후 한문을 그만둔 뒤로, 저는 그 한계를 시험해 볼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4. 지켜야할 '선', 지키지 말아야할 '선'




사실, 공자도 선을 잘 지키는 분이셨습니다. 논어를 살펴보면 '공자의 선(線)'에 대해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칠십이 되자 마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따라 행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欲,


-논어 위정 4-



위정 4장은 매우 유명한 구절이지요. 십오세엔 학문에 뜻을 두고(지우학 ), 삼십세엔 바로 서고(이립 ), 마흔에는 의혹됨이 없다(불혹 )는 말이 들어있는 그 구절입니다. 이 장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칠십입니다. 칠십세가 되자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해도 사회적 규범과 예의, 도리에 잘 맞아 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선(線)'의 체화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그러나 선은 아무곳에나 긋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의 성장판에는 그어서는 안되지요. 공자도 이를 경계하였습니다. 논어를 읽다 보면, 이렇게 스스로를 한계 짓는 이가 나옵니다. 공자의 제자인 '염구'라는 사람입니다. 염구의 말을 통해 내 모습을 발견하고 마음 쓰며 읽었던 대목입니다. 공자가 그와 나눈 대화는 아래와 같습니다.





염구가 말하였다.

"공자님께서 추구하는 길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힘이 부족합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힘이 부족한 사람은 중도에 그만두는 법이거늘, 지금 너는 스스로 선을 긋고 있구나."


 ", .(염구왈 비불열자지도, 열부족야)

 ", 女劃.(자왈 역부족자중도이폐, 금여획)


- <논어(論)語>, <옹야(雍也) 12> -




위에서 소개한 내용의 '염구'와 공자의 대화가 매우 낯익습니다. 염구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더 부끄럽습니다. 마치 십 년 전의 제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염구는 공자의 가르침을 좋아하였지만, 스스로 공자처럼 될 수는 없다고, 역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한문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잘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지요.


공자는 염구를 보고 획(劃), 즉 '선(線)'을 긋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선'은 '한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한계를 긋는 사람은 하던 일을 중도에 그만 둔다고 말씀하셨죠. 그래서일까요? 피치못할 사정 때문이긴 했지만, 저 또한 한문 공부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내 마음에 그은 '선(線)' 때문이이었던가 싶습니다.


위의 염구와 공자의 대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행간에서 제자의 더 높은 성취를 바라는 공자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집니다. 십여 년 전, 내 선생님께서도 그런 마음이셨겠지요.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서운해 하기만 했을까요.



5. '선'을 뛰어 넘어



'한문을 잘 읽고 싶지만 잘하지 못할 것 같아.',  '다이어트해서 날씬해지고는 싶지만 나만큼은 그렇게 안될 것 같아.' 이렇게 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결론짓는 마음, 이것이 마음에 획을 긋는 것이었습니다. 공자의 '중도이폐中道而廢'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동안 내가 마음에 그은 '획'으로 인해 실제 현실에서 실패하고 말았음을 이제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달라져야겠습니다. '획(劃)'을 긋더라도 내 마음에, 내 성장판에는 절대로 획을 긋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이미 그어진 획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획을 그어 이를 뚫고 나아가야합니다. 아래의 시는 이규보가 지은 '두려움의 노래(외부畏賦)'라는 긴 시 중 일부입니다. 이규보의 '획(劃)'은 한계를 꿰뚫는 획입니다.




획을 그으면 하늘이 찢어지는 듯   劃若天裂(획약천렬)

금을 그으면 땅이 쪼개지는 듯      剨似地拆(괵사지탁)


<두려움의 노래> - 이규보 -




위에서 쓰인 '획(劃)'이라는 글자는 논어에서 '너는 한계를 긋고 있구나'라고 해석되는 '금여획(今女)'에 사용된 글자와 똑같은 글자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획(劃)'은 한계를 뛰어넘는 글자입니다. 인간의 머리 위에 하늘이 있는 것은 우주적 한계입니다. 그런데 이 시의 '획(劃)'은 그 우주적 한계마저 뛰어넘게 만드는 한자입니다. 인간이 쏘아 올린 우주선처럼 말이지요.


두번째 구에서도 마찬 가지 입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은 한편 우리의 생을 한계짓는 또다른 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금을 그어 땅을 쪼개고 맙니다. 결국 하늘과 땅의 한계마저 벗어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성장에 필요한 마음이 아닐까요.


'획(劃)' 하나로 마음에 한계를 긋기도 하고 하늘의 한계를 벗어나기도 합니다. 누구나 '획(劃)' 하나로 작게도 되고 크게도 되는 이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내 마음속  한계가 되어 있는 '획(劃)'은 없애고, 내 한계를 찢기 위한 '획(劃)'을 굵게 그어서 그 너머로 나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미 십 년도 더 된 일, 선생님의 가르침을 떠난 지 한참 되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선생님께서는 그 때 나누었던 전화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십 년 전 음성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은 선생님의 말씀이 이제야 '삶의 화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정말 언젠가 행운처럼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하지 못했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네! 선생님! '열심히' 뿐만 아니라 '잘'도 해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 그은 선을 이제는 넘어보겠습니다."



-不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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