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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lelife Mar 01. 2024

20세기 서양 청년과 공자가 함께 공감하는 삶의 이치.

논어 위정 2, 논어 팔일 20


1. 얼 나이팅게일의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


'나는 성취감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가난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가난은 다른 아이들은 괴롭히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만은 지독하게 괴롭혔다.'


대공황이 한창인 1933년, 캘리포니아 남부에 한 아이가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재봉틀 공장에 나가 한 달에 55달러를 벌어 텐트촌에서 세 형제를 길렀다. 그중에서 막내인 '얼'은 유독 궁금해했다. '왜, 무슨 이유로 어떤 이는 부유하고 어떤 이는 가난하게 사는가?' 이것을 알아내는 것이 그의 지상 숙제였다.


 "왜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나요?"

얼은 텐트촌 주변 어른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얼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텐트 촌의 어른들은 교육받지 못한 채 본능에 따르는 삶, 타인이 이끄는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얼은 어른들에게 해답을 찾는 것은 포기하고, 책 속에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롱비치 공공도서관을 찾았다. 어떤 책에 그 해답이 들어있을지 몰라 아무 책이나 꺼내 읽기 시작했다. 아이가 빠져든 것은 여러 종류의 소설이었고 당장 해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아이는 자라서 아나운서로 취직하였다. 그리고 성공의 비밀을 찾기 위해 꾸준히 독서하며 철학과 종교, 심리학에 대해 공부해 나갔다. 1950년, CBS 방송국에서 일하던 스물아홉의 청년은, 여느 때랑 다름없이 책을 읽던 어느 주말에 문득 깨달았다.


여러 종류의 다양한 책을 읽어왔지만, 사실은 노자, 부처, 에머슨, 성경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단 하나의 진실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진실은 바로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였다. '얼'은 이 진실을 요약해 방송으로 전파하고 책으로 알렸다.






2. 공자의 사무사(思無邪)


 

'얼 나이팅게일'의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 We become what we think about.'라는 책은 여전히 베스트셀러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논어의 한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시 삼백 편을 한 마디 말로 정리해 보자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것이다."


 百 一  思無邪

자왈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 무 사


- 논어 위정 2 - 




사특함이란 제게 어려운 단어입니다. 20대에 처음 이 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던 나는,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 내리지 못해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간사할 사(邪), 사특할 특(慝)'으로 이루어진 단어, 사특함. 이를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요사스럽고 간특하다'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네이버 한자사전'에는 '못되고 악함'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지요.


요사스럽고 간특하며 못되고 악한 마음 상태를 사특함으로 정의 내린다면, 사특이란 세상의 모든 '나쁜 것, 바르지 않은 것'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를 토대로 공자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시경>에 담겨있는 시 삼백여편의 공통된 특징은 바로 '시의 중심 생각에 악한 것이 없다.'"로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시경>의 시는 당시 민간에 널리 유행했던 노래의 가사를 공자가 삼백여편으로 추려 정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외교의 공식석상에서, 정치하는 공간에서 <시경>의 시는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석학들에게 <시경>은 매우 중요한 공부거리였습니다.


<시경> 시의 효용이야 이래저래 많다고들 하지만, 당시의 석학들이 배워야 했던 시, 학자들이 널리 애송했던 시편들을 보고 공자가 '사특함이 없음'에 주목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나는 이 부분이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숙제였지요.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라는 책을 읽다가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공자도 또한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라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저>라는 시는 즐거워하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슬퍼하면서도 속상한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자왈 "관저, 락이불음  애이불상."


- 논어 팔일 20 - 




 공자는 <시경>의 첫 번째 시 <관저>에 흐르는 감정이 딱 적절하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에 따르면 <시경>의 시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감정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치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의 감정처리, 악함이 없는 시의 중심 생각. 이것이 공자가 정리한 <시경> 시의 특징입니다.


학자들이 자주 읽어 암송해야 하는 시가 바로 <시경>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시경> 시의 감정과 내용은 학자들에게 무의식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봅니다. 나도 모르게 작동하는 무의식의 영역에 의해 나의 생각과 감정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좋겠지요.


공자도 이와 관련하여 나름의 기준이 있으셨던 듯합니다. 공부하는 이들이 시 한 편도 함부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 생각에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20대 때 매일 듣고 찾는 노래가 슬픈 것들이었습니다. 슬프고 비극적인 사랑이야기, 혹은 공포스러운 이야기 등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담은 책과 뮤지컬, 영화도 매우 좋아했습니다. 원래 20대의 감정이 그래서인지, 제 취향이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20대의 내 감정은 우울, 슬픔, 비탄, 고독, 외로움이 주가 되어 비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시경> 시의 균형 잡힌 감정과 인지상정에 잘 맞는 내용들은 학자들에게 있어서 생각과 감정이 올바른 균형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무의식의 재료입니다. 공자는 학자들의 마음밭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요? 공부도, 마음이 먼저 안정된 상태에서 술술 풀려나가는 법이니까요.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세세한 부분까지 후학을 배려한 공자의 생각들에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 더 빠르고, 더 쉬운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스승의 신념이 느껴집니다. '얼 나이팅게일'은 또 어떤가요. 힘든 시절들을 겪으며 발견한 진실을, 아낌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자 했던 그 마음 또한 따뜻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게 20세기 서양 청년과 공자가 만났습니다. 바로 내 마음속에서 말이지요. 이천 년 전에 살았던 공자의 말과, 1950년대에 삶의 진실을 깨달았다는 얼 나이팅게일의 말이 내 안에서 만나 공명을 합니다.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노인과 청년,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진리는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3. 일상 속에서 찾는 '사무사'



한참 노트북 화면에 코를 박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코딱지야'라는 말에 집중력이 깨지며 주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현실 남매가 사는 우리 집은 매일 두 아이가 서로를 향하는 험한 말들이 난무합니다.


"이 코딱지야."

"오빠는 코털이야."

"이 개미똥!"

"바퀴벌레 똥!"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라고 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서로에게 '코딱지'와 '코털'과 '똥'이 되라고 하고 있으니 속상하긴 합니다만, 저는 웃고 맙니다. 그 말들 속에는 두 남매의 관심(?)과 사랑(?)이 담겨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이 글을 본 두 아이가 '관심'과 '사랑'에 밑줄을 쫙 치며 글에 오류가 있다고 수정해 달라고 강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 집 현실 남매, 두 아이들도 표현은 험하지만 서로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격하게 표출하지 않고 이 정도 선에서 그쳐주는 것만으로도 '락이불음(樂而不淫)'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을 실천하는 것이리라 위안 삼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두 아이의 지금 이 순간의 모습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무사(思無邪)'의 순간이라 생각해 봅니다. 아이다운, 제 나이에 맞는, 제 상황에 맞는 두 아이의 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저는 요즘 주변을 돌아보며 '사무사'의 모습들을 발견하고 눈도장을 찍어두려 합니다. 하나의 감정에 깊이 빠져버리는 스스로의 단점을 알기에,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도 딱 적당한 선에서 조절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잘 되지는 않지만 매일 '사무사'와 '락이불음'의 실천을 위해 애써봅니다.


아이들의 모습, 저의 모습을 공자선생님에게도 자랑하고 싶습니다. 지나친 자랑을 경계하시는 분이시지만, 아마 공자선생님도 '후생가외'라 격려하시며 우리 아이들에게 떡볶이 한 입씩 더 넣어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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