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hilelife Feb 23. 2024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세한도의 청솔이 되기까지

논어 자한 27. / 김정희 세한도 / 조용필 흔들리는 나무, 나무야



아이들과 거실의 책상에 모여 각자의 할 일을 즐기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럴 때면 아이들의 정서에 좋다는 클래식을 틀거나 조용필의 노래를 틀어 함께 감상하고는 합니다. 오늘은 조용필의 14집 앨범 전곡을 듣고 있는데 <흔들리는 나무>가 들려옵니다. 좋아하는 음악이라 한참 심취해 듣는데, 마침 큰 아이가 국어 문제집을 들고 내게 다가옵니다.


"엄마, 이게 뭐예요? 세한도라는 그림이 있나요?"


문제집을 보니 김정희의 세한도를 모티브로 지은 현대시가 실려있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세한도 그림을 찾아보고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들리는 나무, 세한도의 나무, 모두 다 제각기 자기 자리에서 존재하는 나무인데, 왜 둘은 다를 수밖에 없을까?'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깨너머로 흔들리던 나무를 보았지.

어김없이 어둠은 내려갈 곳을 잃어가는데

흔들거리던 여린 그 나무 보이 지를 않아


축복 없는 사랑 흩어지는 추억 정녕 잊히는가

한 곳을 바라보다가 멀어진 지금은 그 어느 곳을 향하나

차가운 벽에 기대인 어둠의 사랑은 외로운 그림자 위에 기대어 있네


-조용필 <흔들리는 나무> 중에서 - 




1. 시련에 휘청이는 나무


누군가를 기다리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남자. 그 남자는 누군가 자기를 불러주기를 바라며 환청을 들었던 듯합니다. 자기를 불렀다고 느꼈던 그 환청은, 어쩌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내는 굉음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잠에서 깨고 보니 사위는 어두워지고 이제는 그 나무마저 보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염원, 사랑하는 이가 있었으나, 그녀는 간데없습니다. 차가운 벽에 가로막히는 기분으로 막막하게 홀로 있는 그를 지키는 것은 외로운 그림자 하나뿐입니다.


위는 조용필의 14집 앨범에 수록된 <흔들리는 나무> 노래 가사의 일부입니다. 내용만 보면 한시에 자주 나오는 상황과도 비슷합니다. 자연물이 일으키는 환청,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리움, 홀로 흔들거리는 그림자는 모두 옛 한시에서 즐겨 사용하던 소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움과 외로움은 예술의 대중적인 소재인가 봅니다. 


바람에 무수히 흔들리는 나무는 그 남자의 분신과도 같아 보입니다. 홀로 바람을 견디며 서 있는 나무에 절망적인 '화자'의 심정을 빗대고 보니 그 외롭고 쓸쓸함이 더욱 힘겹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여린' 나무라고 했으니 외부에서 가하는 힘겨움을 버티기 더 어렵겠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겨울에도 푸르른 나무



18세기를 살다 간 김정희는, <세한도>라는 그림에서 이보다 더한 처지에 놓인 나무를 그렸습니다. 삭풍에 눈 내리는 춥디 추운 한겨울, 이를 견디며 서 있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 겨울이라는 계절 속에 놓인 소나무의 상황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이리라 짐작해 봅니다.


제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김정희의 '세한도'를 처음으로 직접 대면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여전히 곱게 빛나는 종이와 그 종이새로 스며든 먹물의 흔적에 체온이 느껴지는 듯도 했습니다. 일견 거칠어 보이는  터치는 그 하나하나가 멋스러워 보이면서도 꿋꿋한 기상을 응축하고 있었습니다. 


여백으로 비워진 풍경은 황량하고 동굴처럼 웅크리고 있는 집은 오히려 추위에 바짝 얼어있는 듯한데,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네 그루의 솔은 얼마나 위세가 당당한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집을 향해 비스듬히 기운 듯 서 있는 줄기 굵은 나무는 참으로 다정해 보입니다. 튼튼하게 내린 뿌리를 보니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집을 감싸며 지켜온 듯 보이고요. 추운 계절에도 따스함과 강인한 기운을 잃지 않은 모습입니다.


앞의 두 경우 모두 바람과 추위 앞에 선 나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각자가 가진 상징성은 완전히 다르지요. <흔들리는 나무>는 바람 앞에서 마구 흔들리기만 하는 슬프고 안타까운 나무입니다. <세한도>의 나무는 매서운 추위를 온몸으로 견디며 다른 이의 사정까지 돌보아주는 정 있고 굳센 나무입니다. 


이 <세한도>의 소나무는 사실, 논어에 실린 유명한 공자의 말에 그 모티브가 있습니다. 한문 공부를 하러 다닐 땐 '세한연후에 지송백지후조야라' 하며 외우고 다니는 분들을 꽤 보았지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영감, 혹은 감동을 주는 구절인 듯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알게 되지.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歲寒然後, []也.           

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논어 자한 27-




유배지에 있던 김정희는 자신의 벗 이상적을 위해 이 <세한도>를 그렸습니다. 이상적은 김정희가 유배지에서 생활할 때에도 우정을 이어갔습니다. 오히려 귀한 책을 구해 다 주며 유배지에서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도록 애써주었지요. 


김정희는 자신의 벗 이상적을 보며 논어의 이 구절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권력의 눈밖에 나면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벗의 도리를 충실히 하는 이상적의 모습은 김정희에게 큰 감동이었겠지요. 아마 <세한도>의 집은 유배지의 김정희 자신이며그 집을 에워싼 나무는 벗 이상적의 현신이 아닐까요


<세한도>의 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자신의 온기로 온몸을 데워 푸르름을 잃지 않습니다. 푸른 솔가지 끝에 반짝이는 것은 눈도, 얼음도 아니요, 다른 존재마저도 감싸 안아주는 사랑입니다. 


3. 흔들리는 나무가 세한도의 나무가 되려면,



<세한도>의 나무는 한겨울을 견디는 나무인데도 <흔들리는 나무>에서 느껴졌던 고통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 사실, 이렇게 나무에 대한 표현들이 다른 것은 나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소나무도 바람에 흔들리고, 여린 나무도 굳게 버티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살아내고 있을 뿐인데, 어느 순간 인간의 시선은 그 단면만 포착합니다. 


이는 내면이 집중하고 있는 바로 어느 지점 때문입니다. 긍정과 부정 혹은 슬픔과 기쁨의 저울추 사이를 오가는 마음이 발견한 것입니다.


김정희가 작성한 세한도의 내용에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날이 추워지기 전에도 한 그루 솔과 잣나무로 존재했고

날이 추워진 이후에도 한 그루 솔과 잣나무로 존재했는데

성인께서는 특히 날이 추워진 이후에 대해서 언급하셨다네.


"歲寒以前 一松柏也, 歲寒以後 一松柏也

 세한이전일송백야,   세한이후일송백야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성인특칭지어세한지후


- 김정희 세한도 -



김정희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항상 거기 있음'이었던 듯합니다. 나무는 사시사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상황과 감정에 따른 인간의 선택인 것입니다.


인간은 획득보다는 상실에 더 큰 고통을 느낀다고들 합니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보면 더 높은 생존가능성을 위해 인간은 걱정투성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들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하는 생각의 대부분은 부정적인 것이라고 하지요.


저 또한 그렇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보면 내 얼굴은 왜 그리 못생겼는지 모릅니다. 초롱한 눈동자보다는 눈곱이, 도톰한 입술보다는 입가의 주름이 먼저 보입니다. 얼굴을 뜯어보는 것이 미래를 대비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의 뇌는 이렇게 부정적인 것부터 바라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공자가 한 겨울에 화려한 여름 꽃을 보고 싶어 했거나, 김정희가 권력 따라 자신에게 등 돌린 이들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면 어땠을까요? 공자의 눈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김정희의 눈에 이상적이 들어올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 고수인 그들의 경지이겠지요.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내게 없는 것에 시선을 두고 살아가면 나는 가난한 것입니다. 아무리 적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내게 있는 것에 시선을 두고 살아간다면 나는 부자입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마음먹어 봅니다. 거울을 보며 내 얼굴의 예쁜 부분에 더 오래도록 시선을 두어야겠다고요. 그렇지 않아도 평균보다 덜 차는 얼굴인데, 이 얼굴을 들여다보며 고민만 하면 오히려 얼굴에 주름살이나 하나 더 늘겠지요.




다시, <흔들리는 나무>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흔들리는 나무>의 가사 속 주인공도, 공자와 김정희와 같은 마음 고수들의 경지를 닮아간다면 어떨까요? 떠난 이보다는 내 곁에 남은 이에게 시선을 돌려본다면 어떨까요? 없음보다는 있음에 집중하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며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람에 가지가 흔들릴지라도 나무는 그 뿌리로 자기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 버티고 견디며 여전히 푸른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로, 아래의 노래처럼 말이에요.







나무야 넌 뿌리가 깊으니 

나무야 저 바람이 불어도

나무야 푸르른 꿈 꾸며 서있구나


-조용필 12집 수록 <나무야>-




이전 04화 21세기에도 논어를 읽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