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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lelife Feb 21. 2024

21세기에도 논어를 읽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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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문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끔 논어를 찾아 읽고는 합니다. 특히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끔 회사 점심시간에 논어를 읽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본 몇몇 분들의 반응은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됩니다.


반응 1 : "와! 논어를 읽으세요? 신기하고 대단해 보여요." 

반응 2 : "AI가 발달하고 있는 21세기에 논어를 꼭 읽어야 하나요? 그게 그렇게 좋아요?"


두 반응 모두 이해가 가능합니다. 저 또한 우연히 한문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생각을 것이니까요. 특히 지금은 첨단 과학 시대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대화를 나누고 텍스트를 기반으로 동영상도 만들어주는 수준으로 진화 중입니다. 그러니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런 시대에, 굳이 2천 년도 더 지난 사람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 논어에 관심을 두는지 말입니다.


논어는 과학책에 나오는 삼엽충의 화석처럼, 역사책에 등장하는 석기시대 사람들이 썼다는 돌로 만든 도구들처럼, 구시대의 유물에 더 가까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꾸준히 논어를 읽는 이유, 부끄럽지만 진하게 고백하려 합니다.



1. 무늬만 모범생이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매우 바람직한(?) 학생이었습니다. 교과서와 사전을 학교에 두고 다니는 것은 학생의 본분이 아니라고 들었기에 책으로 터질듯한 가방을 이고 지고 등하교를 했습니다. 하루도 빠짐이 없었습니다. 허리와 골반통증에 시달렸지만 꾸준히 그리했습니다.


도시락을 싸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여고임에도 불구하고 학급 친구들은 대부분 2교시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었었지요. 때문에 점심시간이나 석식 시간이 되면 담을 넘어가서 분식을 사 먹는 친구, 자장면 배달을 시켜 먹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속으로 참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 한 번도 그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학교의 모든 규율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냐고요? 바른 삶에 대한 원칙이 있었냐고요? 절대 아닙니다. 그저,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대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규율이며 규칙을 어겼다가 들키면 잔소리를 듣고 된통 혼이 나는 것이 싫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무늬만 철저한 모범생이었습니다. 진짜로는 대충대충 건성건성이었죠. 


제대로 된 목표도 없었기에 공부도 야단 안 맞을 정도로만 했습니다. 공부하기 싫었던 수학과 영어 문법은 대충 찍어서 위기를 모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모의고사에서는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학 학과의 합격권이 나왔기에 나는 안심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항상 실전은 다를까요? 실제 수능에서 찍신은 저를 배반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수능 수학이 쉬워서 다들 성적이 올랐다는데, 찍기에 실패한 나는 평소보다 성적이 더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수능을 망쳤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도 없었기에 대충 성적에 맞추어 원서를 작성했습니다. 원하는 학과는 갈 수 없었지만 원래 가려던 대학의 국문과 정도는 쓸 수 있는 성적은 되어 안도했습니다. 그나마 책은 좋아하니 국문과에 들어가면 그럭저럭 살 수 있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지망 대학에서 최대로 하향지원할 것을 권했습니다. 재수도 시키지 않을 생각이므로 무조건 합격해야 한다며 독일어 전공을 추천했습니다. 문제는 내가 독일어를 무척 싫어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원서 쓰는 기간 내내 부모님을 설득했지만 실패했고, 저는 그렇게 싫어하던 독일어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2. 우울의 계절이 오래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꿈꾸던 캠퍼스의 낭만은 그렇게 시작부터 어긋나 있었습니다. 싫어했던 과목이 전공이 되니 대학 수업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속한 전공과 학과를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만 간절해서 저는 같은 학과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친구 사귀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나에 비해 다른 학생들은 즐거워만 보였습니다. 수업시간에는 서로들 웃으며 즐겁게 수업을 하고, 공강시간에는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맛집을 다니며, 미팅이며 소개팅을 하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가끔 연락이 닿는 고교 때 친구들도 내가 꿈꾸는 바로 그런 캠퍼스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만 홀로 뒤처져 있는 듯했습니다. 비참한 마음만 가득했지요. 수업에 참여하는 날보다 빠지는 날이 더 많아졌습니다. 등록금을 내어주는 부모님께 죄송해서 겨우 용기를 내 학교에 가는 날은 대학 교문을 바라보기만 해도 답답함이 밀려와 한숨부터 내쉬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캠퍼스 잔디밭 구석진 곳에 쭈그려 앉아 다음 수업 시간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한 여자분이 다가와 알은체를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학생, 참 힘들어 보이네요. 기분이 우울한가요? 학생이 교문에 들어서는 모습을 제가 보았는데요, 마치 먹구름도 함께 몰려오는 것 같았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울고싶었는 지 모릅니다. 당시 내 마음을 그렇게 알아주는 이는 처음이었거든요. 짐작하시는 대로 그분은 캠퍼스 안에서 '도(道)를 아시나요'를 묻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저는 익히 알면서도 다음 수업을 빼먹고 그 언니를 따라갔습니다. 제사를 지내면 운이 풀린다는 말에 전 재산 만원을 털어 제사도 드리고 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내가 참 우스웠습니다. 모르는 사람을 덜컥 따라갔다는 것도 그렇고요. 제사를 지내고 왔지만 달라지는 것도 없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살아야 할 텐데 생각은 해보았지만, 그렇게 살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앞이 보이지 않는 매일을 살며 나는 더욱더 침잠했습니다.


방황은 더 해갔습니다. 시험을 보는 날에도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대학 생활 내내 낙제점수만 받다가 등록금이 아까워 휴학만 2년 넘게 했습니다. 어른들이 말한 것처럼, 대학에 들어가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던 우울의 계절이, 끝나지 않은 장마처럼 계속되었습니다.



3. '흔들리는 나무'처럼 살았던 것은 내 탓입니다. 



내 삶이 아닌 다른 이의 삶만 바라보며 부러워했던 그 지금 시간들을 돌이켜봅니다. 왜 흔들렸을까. 왜 그렇게 방황했을까. 생각해보면, 내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바로 가치관이었습니다.


 '삶'에 대해 다룬 많은 고전 소설들을 읽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것은 내게 구경거리에 불과했습니다. 독서를 통해 '나'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소설은 흥미로 끝나고 공부는 시간 때우기식이나 벼락치기 식으로 했으니 내 안에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너의 삶에 대해 생각해'라는 환경의 종용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간표도 직접 짜야했고 동아리 활동도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중간중간 남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도 내가 선택해야 했고 친구도 내가 선택해야 했지요. 


그런데 이 '선택'이라는 것은 내가 지향하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깔려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저는 선택지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향하는 가치가 없으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 지, 아무것도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손발이 묶인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이만 어른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저 환경을 탓할 뿐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뒤 4년을 그렇게 방황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3개월 수능 공부 후 다시 대학에 입학 원서를 넣었습니다. 이번에는 학교와 학과 모두 제가 선택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의 '한문교육과'에 지망했습니다. 성적을 기준으로 두되, 부모님의 바람과 나의 바람 사이에서 나름대로 타협점을 둔 곳이었습니다. 한문은 '사람 인(人)' 한 글자밖에 몰랐지만 국어를 잘했으니 한문도 잘 해내리라 막연히 생각하며 지원했고, 감사하게도 공부한 기간에 비해 무난히 합격했습니다. 처음으로 내 미래를 내 손으로 설계해 본 순간이었습니다. 


그림 강지수의 모란 / 어둠 속에서도 빛나게 피어난 꽃이 인상적이다. 우리 삶도 그러하길.



4. 그렇게 논어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하여 늦깎이 대학생으로 처음 만나게 된 책이 <논어>였습니다. 처음 한문 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위해 논어의 유명한 구절이나 쉬운 구절을 찾아 한문 그대로 강독을 하는 수업이었습니다. 교과서 속에서나 보던 공자, 논어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감히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

         


"敢問死."                                    

 감 문 사


- 논어 선진 11 -




간단한 이 문장은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공자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이 문장은 이렇게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을 때 만났습니다.


대학에 새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내가 싫어하는 과목을 전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만 있을 뿐. 앞으로의 삶이 막막하고 빛도 없는 동굴처럼 느껴지는 건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간절히 해보고 싶었던 질문이었습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도 제자 '자로'에 기대어 '죽음'에 간절히 묻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삶이 죽음보다 나은지 알고 싶었습니다. 


남들보다 출발선은 한참 늦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도 알지 못하겠고. 다른 친구들은 벌써 취직하여 자기 삶을 찾아가는데, 나라는 인간은 참으로 한심하다 느끼며 '산다는 것'이 벌써 지겹게 느껴졌던 20대였습니다. 


공자는 어떻게 대답하였을까. 나는 큰 기대를 가지고 공자의 대답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공자는 제자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지요.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아직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曰 未知生, 焉知死                              

왈  미 지 생, 언 지 사


- 논어 선진 11 -




'응? 이것뿐이야?'


뭔가 현학적이고 멋진 말을 기대했는데, 막상 공자의 대답은 소탈하기 그지없었고, 내 마음은 덩달아 허탈해졌습니다. 그러나 허탈함은 잠시, 그 여운이 깊게 남아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문장을 처음 만난 날, 저는 하루 종일 사전을 뒤적이며 한자를 찾아보면서 이 문장을 스스로 해석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한자 하나하나를 읽어가며 그 의미를 곱씹고 또 곱씹어보았습니다.


세계의 석학이라 칭송받는 어른이 '삶'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제자가 묻는데도, '모른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신선했습니다. 내가 선생님이라면 아는 척, 어떤 말이라도 늘어놓을 텐데요. 


게다가 여러 번 읽다 보니 면박을 주는 듯한 그 문장에서는 되려 따뜻함이 느껴졌습니다. 죽음에 호기심을 갖는 나와 같은 젊은이에게 '떼지'하며 떼어놓으려는 사랑의 힘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물로 기어가는 아기를 어른이 번쩍 들어 올려 안아주는 듯 안도감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문장을 들여다보니 마음속에 느낌표가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았던 어르신이, 나보다 더 많은 공부를 했던 어르신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삶'입니다. 그런데 이제 20대 중반도 채 되지 않은 데다 제대로 된 공부도 이제 막 시작하는 내가, 삶에 대해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나의 방황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나의 방황은 계속될 예정이라는 예감이 왔습니다. 공자만큼 살아내고 공자만큼 공부해도 모를 것이 '삶'이니까요. 그러니, 앞으로도 방황하고 헤매더라도 스스로를 탓하지 말자고 다짐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자꾸 움츠리기만 했던 내게, 용기라는 것이 조금쯤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공자보다 더 살아봐야겠다고, 공자보다 더 공부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야 죽음을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길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태껏 살며, 지금껏 공부하고 있습니다. 물론 공자만큼 공부하려면 앞으로 이백 년은 더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20대에 만난 논어가 그 순간 날 살린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5. 이것이, 21세기에도 논어를 읽는 이유입니다.



처음 대학에 입학하며 겪은 우울증은 나의 20대를 온통 뒤흔들었습니다. 쉽게 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흔들어대어 나를 보잘것없게 만들고, 삶보다는 죽음에 호기심을 갖게 만들고는 했습니다. 


다시 들어간 대학에서 위의 문장을 만나고 나서도, 우울증은 바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공부에만 매달리니 더욱 깊은 우울증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붙들어 준 것은 역시, 부모님의 삶과, 가슴을 울리는 (조용필의 노래와) 공자의 말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가끔, 우울할 때면 이 문장을 찾아 읽고는 합니다. 인간관계가 힘들 때, 삶에 대해 잘 모르겠다 여겨질 때, 이 문장을 읽으면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올라 홀로 웃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합니다. 공자의 제자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친근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죽음보다 삶을 노래했던 공자, 젊은이들 앞에서 '모름'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공자, '죽음'에 호기심을 갖지 않도록 '떼지'해줄 수 있는 공자를 만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내가 행복해서, 내 주위의 다른 많은 사람들도 함께 논어를 읽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좋은 스승님을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것 처럼 말이에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때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이 가진 길이니까요. 다행인 것은, 이천 년 전이건, 지금이건 간에 사람 사는 이치는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21세기에도 논어를 펼쳐 들고 공자와 공자의 제자들을 만나러 갑니다. 


공자와 공자의 제자들이 만들어낸 변주곡, 논어 안에서 공자와 공자의 제자들 사이에 끊임없이 오가는 질문과 대답들을 읽고 있으면 나도 어느새 그 속에 끼어들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어떻게 질문해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논어의 문장들은 스스로의 삶을 점검하라며 끊임없이 말을 겁니다. 


바로, 이렇게요.


 '그 옛날에 살던 우리도 이렇게 고민하고 배우며 살고 있어

그런데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니?'





*아래는 논어 선진 11장의 전문을 실었습니다. 



계로가 물었다.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 여쭙습니다."

공자께서 답하셨다. "아직 사람도 잘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잘 섬기겠느냐."


"감히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

대답하셨다. "아직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季路, 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계 로, 문 사 귀 신      자 왈   미 능 사 인,  언 능 사 귀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감 문 사       왈   미 지 생,   언 지 사


-논어 선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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