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옹야 23
옛날에 '모난 그릇'이라는 이름의 술잔이 살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네 개의 모서리를 가지고 있어서 '모난 그릇'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변덕스러운 사람들이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디자인이 달라지면서 술잔을 둥글게 만들기 시작했고, 심지어 '모난 그릇'도 이름은 그대로 둔 채, 둥글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서리가 없어진 '모난 그릇'은 이름을 따라 '모난 그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모양 따라 '둥근 그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모난 그릇이 모가 나있지 않으면
모난 그릇이겠는가!
모난 그릇이겠는가!
子曰 觚, 不觚, 觚哉! 觚哉!
雍也 23
<논어>에 보면 이 '모난 그릇'은 한자로 '고(觚)'라고 부릅니다. 이 '고(觚)'라는 글자는 '모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말 그대로 모가 났다는 뜻을 자기 이름으로 삼은 술잔입니다.
그런데 위의 문장을 보면 공자는 '모난 그릇'은 '모난 모습'이어야지 '모난 그릇'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나지 않은 술잔은 '모난 그릇'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는 것이니, 명분과 내실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름대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는지요. 모난 그릇은 모난 그릇의 모습대로 살아야 자신의 이름대로, 자신이 생겨난 대로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이 모난 그릇을 더 예쁘게 다듬어 준다며 둥글게 만들어버린다면, 이 모난 그릇은 자기만의 개성도 잃고 이름도 잃게 되는 꼴이 됩니다.
사실 저는 이 '모난 그릇' 속에서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타고난 대로 살고 있을까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습, 남이 요구하는 모습, 상황이 요구하는 모습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돌이켜보니 정말로 사소한 것에서부터, 저는 내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짬뽕을 먹고 싶지만 다들 짜장면을 먹으니 나도 모르게 짜장면을 선택하는 나입니다. 내 재능과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무시하고 다들 좋다고 하는 직장에만 서류를 내고 기웃거렸던 나입니다.
직장에서는 어떤가요. 입바른 말 할 줄 모르고 내 소신도 밝힐 줄 모릅니다. 기분 나쁘다면 기분 나쁘다고, 즐겁다면 즐겁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이렇게 십수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논어를 접한 지 10년도 더 넘어서야, 자기 계발서를 꾸준히 읽은 지 2년 만에야 문득 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내가 진짜 누리고 싶은 생은 무엇일까?
진짜 나답게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이지?
그런데,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성향의 사람이며 어떤 활동을 좋아하는 지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제야 내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유튜브 보고 따라 산 밀키트가 한가득, 쇼핑몰에서 싸다길래 샀던 소파, 인스타그램에 혹해서 산 책장...... 수많은 물건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중에 정작 내 취향인 것은 청자 컵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어릴 적에 제 이름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던데,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눈치를 보는 것을 배려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내 어리석음 때문일까요? 내 뜻을 관철했다 꺾이는 게 민망하여 용기를 못 내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남들 사는 만큼 살고 있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돌아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고요. 어찌 되었든 저의 모습은 둥글게 만들어진 저 불쌍한 '모난 그릇'과 같은 꼴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작년 2023년 1년 간 저는 스스로에게 '진정한 나 찾기 프로젝트'라는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내가 좋아하는 색깔, 내가 좋아하는 식기 등 단순한 것에서부터 내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취미 등을 탐색해 나갔습니다.
진정한 나를 찾다 보니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가족들은 나의 선택과 바람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자 가족들이 더더욱 소중했습니다. 나의 존재를 돌아보며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의 마음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힘든 공부 과정을 거쳐 한문 읽기라는 매력적인 취미를 만들었으니 그것도 잘 살았다고 말할 만은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책을 읽고 독후감 쓰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읽지 않다가 조금씩 늘려나가던 독서량도 더더욱 늘었습니다.
프로젝트는 아직 진행 중입니다.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온 순간들이 많아서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할 때 걸림돌이 되고는 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택하여 저질러본 뒤에야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후회가 잦습니다.
이런 나의 상태를 보고
공자가 살아 돌아와서는 제게,
너는 지금 너답지 않으니,
너라고 할 수 있느냐!
라고 하셔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사실, 이 프로젝트가 언제 끝날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평생의 숙제가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들고 말이지요.
'모가 났다'는 것은 나만의 개성입니다. 나만의 '엣지(Edged)'이지요.(엣지를 강조하는 자기 계발서적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개성을 지켜 살아내는 삶, 혹은 나의 개성을 되찾아 사는 삶에 대한 경외심이 듭니다.
'개성'을 진정한 강점으로 만들어 살아간다면 그것이 나를 살리는 소득의 방편이자 고유한 라이프 스타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의 모습 그대로 나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가진 상황과 모습이 마음에 들고 만족스럽다면 그 자체로 수용하는 것이지요.
저는 전자를 택했습니다. 나의 본질을 되찾아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좌충우돌에 시행착오가 많아 피곤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둥근 모양으로 '모난 그릇'이라는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그 술잔도 선택을 해야겠지요. 돌밭을 굴러 자신의 둥근 모습을 갈아 내어 다시 모서리를 낼 지, 아니면 아주 이름을 바꾸어버릴지 말입니다.
'모난그릇'이 어떤 선택을 하든,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를 찾는 험난한 여정을 진심을 다해 응원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