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의 베네치아

1월 1일 리도섬에서 해돋이

by 이태리부부

30대의 시작, 누구나 하는 퇴사의 고민을 앞두고 내 절친한 친구가 연말, 연초를 보내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 베네치아로 여행을 왔다. 1월 1일은 열흘간의 여행 중 절반을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친구에게는 퇴사와 새로운 출발에 대한 고민이, 나에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30살 백수 주부로써의 고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새해의 첫날 아침 일찍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베네치아의 리도섬으로 향했다. 베네치아의 리도섬은 베니스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섬이다. 당연히 모든 상점은 문을 닫고 리도섬은 조용할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심기일전 해돋이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맨몸으로 바다 수영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중에 우리의 눈길을 끈 노부부가 있었다. 우리가 해돋이에 심취해 있을 무렵 노부부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털모자를 쓰고 바닷가의 우리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내로 보이는 여성은 옷을 벗고 수영복만을 걸친 채 차가운 바다로 몸을 내밀었다. 마치 오랫동안 오늘만을 위해 결심한 사람처럼 결의에 차있는 모습이었다. 춥다거나 외마디 비명도 없이 심지어 가벼운 스트레칭도 없이 스스로 차가운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보는 사람들만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당사자는 여유롭게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카메라로 열심히 담고 있는 남편. 어떤 결심이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끝끝내 알지 못했지만 그 날 노부부의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앞으로 매 년 새해 첫날이 되면 리도섬을 찾을 이유가 생겼다. 나는 언제쯤 겨울 바다에 뛰어들 용기가 생길까?

그날은 눈만 마주치면 모든 사람들이 Auguri(축하해!)를 외쳐주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손발이 모두 꽁꽁 얼어붙었지만 마음만은 뜨겁게 녹아내렸다. 우리도 새해 첫날을 맞이하여 각자의 바람을 토해냈는데 올해 우리의 관심사는 뭐니 뭐니 해도 새로운 경제활동과 돈에 관한 것이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참 비참해지고 우리가 좋아하는 여행이고 미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친구는 나보다도 더 간절히 기도하는 듯했다.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우연히 새해 인사를 하다가 나의 지인을 통해서 친구는 당장 헝가리 여행사와 면접 약속까지 잡게 되었다. 리도섬 해돋이 꽤나 기도를 잘 들어주시나 보다 하고 우리는 생각했다. (결국 친구는 헝가리 회사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아내의 사진을 보고 흐뭇해하는 남편

내가 찍은 이 사진도 전해드리고 싶다. 2020년 1월 1일의 리도에서 부부를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다. 겨울철 리도섬은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차가운 바다에 몸을 내던지던 중년 여인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강렬하게 잔상이 남아있다.


1월 1일의 베네치아는 대부분의 상점이나 미술관, 박물관이 휴관이므로 바쁜 여행자들에게는 최악의 여행 기간에 속하겠지만 조용히 산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저녁이 되자 문을 닫았던 상점들이 슬금슬금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어 우리는 와인을 한 병씩 샀다. 그리고 노을을 안주삼아 홀짝 마셔버렸다. 약간 아쉬운 듯싶게 취기가 오르면 베네치아가 훨씬 아름다워 보는건 기분탓일까? 베네치아를 여행하신다면 와인은 꼭 한 병 준비하시길.


구름도, 노을도 열 일 한 새해 첫날의 베네치아. 며칠 후 친구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나는 베네치아에 그대로 남았다. 언제나처럼 새해 첫날의 다짐은 작심 3일로 끝이 났지만,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고, 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살아있다. 그거면 됐다 싶다. 좋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도록 꾸준히 준비를 하고 이렇게 기록을 열심히 남겨야겠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하루는 모두 잊힌다.

새해 첫날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모든 것이 익숙한 듯 또다시 새롭게 느껴졌다. 이탈리아에서의 삶이 어느덧 5년 차가 되었다. 앞으로 어떤 도시에서 또는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베네치아만큼 늘 새롭게 느껴지는 도시가 또 있을까 싶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매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잠 못 드는 새벽이다.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글을 써야 할 때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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