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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안녕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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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부부 Jul 04. 2022

여름을 나눠 먹던 날

수박 한 덩어리 14유로, 체리는 1㎏에 11유로, 복숭아 1㎏에 4.5유로. 이 가격이 맞나? 내 눈을 의심하다가 과일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여름의 달콤하고 저렴하기까지 한 과일은 단연코 이 계절이 기다려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가스 불 켜기도 무서운 뜨거운 여름, 과일은 간식이자, 천연 비타민이자, 식사 대용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불안정한 전쟁 상황, 유난히 일찍 찾아온 무더위는 고기, 쌀, 생필품을 비롯해 과일 가격까지 무섭게 상승시켰다. 5월 중순부터 30도를 훌쩍 넘더니 이른 무더위에 가뭄까지 더해져 특히 올해 과일, 채소 값은 금값이 되었다. 내 장바구니는 예전처럼 신선한 식품 대신 저렴하고,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대용량, 냉동식품으로 채우는 날이 많아졌다. 어김없이 비싼 체리를 집었다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물가 상승은 곧 삶의 질과도 직결되겠구나.” 그리고는 갑자기 아찔해졌다. 




이탈리아 생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꼽던 저렴한 식료품 가격은 이제는 옛말이 되었나 보다. 물론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코로나 이후 전 세계가 물가 상승에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안다. 무서운 속도의 인플레이션과 더불어 세계 경제 침체에 대한 뉴스는 어쩐지 코로나보다 더 현실적이고 날카롭게 위기 상황을 직시하게 만든다. 2년의 공백 후 이제 겨우 일상으로 돌아와 살만해졌는데 우리는 또다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연일 이어지는 물가 상승 뉴스로 나는 혼자 계시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혹시나 물가가 비싸 드시고 싶은 음식도 마음껏 못 드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물론 “다 괜찮다, 내 걱정 말어라.” 하실 것이 뻔하지만, 나조차도 버거운 여름이었기에 유독 마음이 많이 쓰였다. 내 걱정과 달리 아버지는 시골집의 작은 텃밭을 일구어 수확하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계셨다. 새집으로 이사한 해, 엄마의 암 판정으로 병수발을 하느라 수년 동안 놀고 있던 작은 텃밭이 이제야 제 역할을 찾은 것이다. 열 평 남짓한 자그만 밭에 상추, 깻잎, 고추, 파, 가지, 호박, 토마토, 블루베리까지 풍성한 여름의 결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셨다. 나보다 훨씬 어른인 아버지가 기특해서 나는 여러 번 과도한 칭찬을 쏟아내었다. 아버지는 더 신이 나서 매일 농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내주셨다. 엄마의 손길이 가득 묻은 담장 안에 아버지의 여름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일자로 정렬된 농작물들에 빼곡히 달린 이파리, 마알간 얼굴의 열매들을 보면서 소일거리를 찾으셨구나, 지루하지는 않으시겠구나, 더불어 물가 걱정도 덜었구나! 하고 안도했다.     


 

어느 날에는 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하다가 텃밭에 잘 익은 보랏빛 블루베리 나무에 우리의 시선이 멈추었다. 항암치료로 이가 모두 빠져버린 엄마가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많지 않아서 심기 시작했던 블루베리였다. 몇 년 동안 성과가 없더니 유난히 뜨거운 올해는 어쩐지 풍년이었다. ‘이제는 먹을 사람도 없는데,’ 쓸쓸한 손으로 여러 알을 따서 한입에 털어 넣는 아버지의 눈에는 이내 땀방울 같은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나도 그 헛헛한 실루엣을 바라보다가 가슴이 조금 뻐근해졌다. 수확의 기쁨은 어느새 그리움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존재의 부재는 시도 때도 없이 작은 사물에도 투영되어 불쑥 찾아와 온갖 뜨거운 것이 끓어오르게 한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일 것이다. 나는 여느 때처럼 애써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자주 끔뻑이며 쏟아지는 눈물을 밀어 넣으려 애썼다. 애꿎은 체리 한 알을 오도독 씹으면서 말이다.     


 

여름은 열매를 맺는 계절이라 여름인 걸까. 잘 자란 여름의 결실은 사랑 그 자체였다. 그날 우리는 엄마를 떠올리면서 한동안 오물오물 사랑을, 그리움을 가득 품은 여름을 나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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