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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차언니 Sep 23. 2020

꿈을 가지지 않는 아이가 되렴

타인의 의사에 좌우되지 않는 삶

- 반백수 1호_육아휴직 아빠
- 반백수 2호_전업주부 엄마
- 반백수 3호_만 1세 아기


3호는 꿈을 가지지 않으면 좋겠어.


뚱딴지같은 말이었다. 2호는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싶어 토끼 눈을 하고 1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3호가 안전용 펜스에 온몸을 기댄 채 1호에게 해맑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를 응시하고 있는 1호의 평온한 표정을 지켜보자니, 2호는 왠지 찝찝한 이질감이 들었다. 파릇파릇 자라나고 있는 사랑스러운 3호에게 꿈이 없으면 좋겠다니? 이건 마치 갓 싹을 틔운 새싹에게 꽃을 피우지도, 열매를 맺지도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지 않나.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파격 발언의 주인공인 1호는, 2호의 꿈을 가장 굳건히 지지해주는 사람이다. 시도 때도 없이 새로운 포부를 밝히는 그녀에게 단 한 번도 '그건 안 될 것 같은데?'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한 적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은 2호는 일정한 주기에 따라 무기력에 빠지곤 했다. 임하고 있는 작업의 텐션이 한참 고조되었다가 결국 그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었을 때, 또는 설레는 마음으로 세우고 있던 계획이 이런저런 이유로 한순간 좌절되었을 때 등등. 무력감은 잊지도 않고 낮은 자존감을 굳이 챙겨 왔다. 이렇듯 마음의 기력이 쇠잔해질 때면, 2호는 한 가지에 끈질기게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의 성향 때문에 행여 주변 사람들이 곤란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가정을 이루었으나 딱히 부유하지 못한 소시민이 평범함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은 흔쾌히 환영받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니 산만하고 깊이가 없다는 이야기,
생활을 영위하는 데 대한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꿈을 꾸지 못하는 사람들의 질투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은 당신 같은 사람들이 그려내는 거야.

    

1호는 이다지도 예쁜 말로 2호의 자존감을 끌어올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3호에게 던진 말을 곱씹으며, 2호는 배신감 엇비슷한 감정이 배꼽 어귀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럼 여태껏 자신에게 해 주었던 말들은 한낱 '내 귀에 캔디'였단 말인가?


반백수 부부 연애시절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입구에서 찍은 문구. 2호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한마디!


꿈을 가지지 않으면 좋겠다는 말이 도대체 뭐야?


마음속의 카오스를 한참 동안 헤매고 나서도, 2호는 정말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혼란이 가득 담긴 질문을 던졌다. 1호는 그녀의 혼돈이 다소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속도감 있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


속는 셈 치고 귀 기울여 보았다. 그의 변은 이러했다. 3호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꿈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이를테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으레 적어 내라고 나누어 주는 생활기록부용 종이의 장래희망란이 빈칸이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 작은 공란에 스스로 선택한 경험들을 채워 넣고, 잠 못 드는 수 없이 많은 밤의 고민도 차곡차곡 담고 난 뒤의 그 어느 날, 비로소 벅찬 꿈과 직면하기를 응원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역시는 역시. 2호는 1호를 의심했던 찰나의 시간을 반성했다. 그렇게 그녀는 또 자신의 남편에게 새삼스레 반하고 말았다.


그렇다. 모두에게 꿈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카페에서 1인 1잔을 권장하듯 누군가에게 1인 1꿈을 권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꿈을 꾸는 시기에 제한을 두는 것도 온당하지 않다. 모든 꿈은 19세 이전에 완성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 사회는 꿈이 없는 아이들을 왜 패배자처럼 취급하는 것인가. 2020 퍼스트브랜드대상 시니어 부문 대상을 수상한 패션모델 김칠두 님도 예순이 넘어서야 자신의 꿈을 꾸고 이루지 않았는가!(최근 2호에게 큰 감명을 준 사람이다.) 그래, 꿈은 타의적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꾸고 이루어 내는 것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꿈을 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너무나 멋진 패션모델 김칠두님! (출처:티에스피공홈)


돌이켜보면 반백수 부부의 세대는 부모의 크고 작은 희망 사항을 마음에 아로새긴 채 자라났다. 그들은 자식이 품고 있는 흰 도화지에 자신들이 꿈꾸는 인생 지도를 알게 모르게 새겨 넣었다. 대부분의 아이는 부모의 희생으로 꾹꾹 눌러 쓰인 그 지도를 차마 지우지 못하고, 한 발짝 한 발짝 그 길을 따라나섰다. 간혹 지도의 원본을 감쪽같이 덮어버릴 만큼의 강력한 안료를 찾아 나서는 용자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미리 그려진 지도를 가이드라인 삼아 살았다. 그리고 어느 지점쯤에서 대부분 길을 잃었다. 그 지도의 목적지에는 자신의 것이 아닌 부모의 꿈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도달한 자도 그렇지 못한 자도 모두 주체적인 삶 속에서는 미아였다. 부모 세대를 폄하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가 피해자라고 단정 짓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시대가 그러했고, 그 속에서 모두가 가련했을 뿐. 그런 시대를 관통해 온 반백수 부부는 3호에게 꿈꿀 자유를 충만하게 줄 수 있을까?


갈라진 암벽에 피는 꽃이여
나는 그대를 갈라진 틈에서 따낸다
나는 그대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 그대가 무엇인지,
뿌리뿐만 아니라 그대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신이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 소유 양식의 설명을 위해 등장하는 영국 시인 '테니슨'의 시다. 시의 화자는 꽃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는 꽃을 뿌리째 뽑아낸다. 지적인 명상으로 시를 멋지게 끝맺고 있지만, 꽃 자체는 자신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써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다. 반면 같은 페이지에는 존재양식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 일본 시인 '바쇼'의 하이쿠가 등장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냉이꽃이 피어 있네
울타리 밑에!


하이쿠 속의 화자가 꽃을 바라보고 보인 반응은 전혀 다르다. 그는 꽃을 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손조차 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자세히 살펴볼 뿐이다.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언뜻 꿈보다 해몽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이쿠 특유의 기술방법에 따르면, 화자가 감정적으로 꽃에 동화되었다고 이해해도 좋다.


자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유약한 시절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이 부모의 몫이기는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생존과 윤리에 대한 문제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인격체로서 아이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 능동적으로 자신만의 선택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 그리하여 목표의 성취와 성공의 희열을 경험하게끔 하는 것. 반백수 부부는 바쇼의 하이쿠에 등장한 화자처럼 '3호의 나날을 그저 자세히 바라보며 함께 울고 웃는 부모'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3호야, 부디 타의에 의해 꿈을 가지지 않는 아이가 되렴.


따분하다고 느껴졌던 2호의 육아 일상에 1호의 육아휴직은 매일매일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이 끊임없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그들을 부모로서 한 뼘만큼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것이다. 2호는 이날 이후로 잠든 3호를 바라볼 때마다 짧은 기도를 읊조리게 되었다.


조바심 내지 않고 아이의 꿈을 가만히 기다려주는 부모가 되도록 도와주세요!
어떤 꿈을 꾸더라도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돌잡이 때 꼭 돈을 잡게 해 주세요!

(하지만 결국 3호는 돈 대신 청진기와 판사봉을 잡았다는 후문...)


시도 때도 없이 (다른 의미의) 꿈을 꾸는 귀여운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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