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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황 Apr 20. 2023

사랑과 창의성

너의 한 시절을 떠올릴 때


은아,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태권도 학원을 갔겠지? 피구도 하고 친구들과 간식도 나눠 먹겠지. 나는 강의를 듣고 집으로 가려고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단다. 1호선에서 2호선을 갈아타는 대신 경의중앙선을 타는 편리하고도 싼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기분이 몹시 좋았지. 좌석에 앉아 ‘아픈 영혼을 위한 철학’을 읽으려고 했어. 그런데 집중할 수가 없는 거야. 웬 아가의 옹알이 소리가 차량 안을 가득 메웠거든. 시끄럽다고 할 수 없는 소리였어. 너무 작은 3개월에서 5개월 미만 정도 되어 보이는 아가가 내는 소리였어. “어마아아아아아, 아브아아아아아아아…‘ 이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둘러봤지. 바로 내 앞 좌석에서 아기가 야구모자를 쓴 여성에게 안겨 내는 소리였던 거야. 쌍꺼풀 진 눈이 동그랗고 이마도 동그란 아기였어. 고 작은 인중에서 콧물이 반짝반짝 빛나는데 아이는 닦지 못하니 찝찝한지 그 영롱한 눈에 금방 눈물이 고이더구나. 곧 울음이 그쳤어. 의자 사이에서 그 아이의 얼굴이 바깥 창을 향해 고정된 것이 보였어. 창밖으로 지나가는 광경에 집중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더라. 아이야, 네가 보는 것이 무엇이니, 너무 궁금하구나. 그래서 나도 함께 아이가 눈 맞추는 곳을 향해 애써 시선을 고정해 보았어. 그냥 전신주, 빠르게 지나가는 다리뿐인데 아이는 너무 신기해하더라. 내가 낳은 사람 마냥 다른 아이에게 감탄하다가 아이가 잠들자마자 너에게 편지를 써.


은아, 나는 너의 아기 적 모습을 그 아이처럼 선명하게 그려낼 수가 없어. 왜 그러냐고? 복잡한 이야기를 좀 풀어봐도 될까. 엄마는 아빠를 닮은, 정확히는 아빠의 우직함을 닮은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었어. 순한 눈빛으로 등을 긁어주고 긴 손가락으로 진공청소기 헤드의 먼지 흡입기를 청소하는 세심함을 타고 태어난 사람. 그러면서도 남과 조화하면서 때로는 남의 색으로 자신의 색이 혼탁해지지 않게 애쓰는 사람. 그런 사람을 키우고 싶었어. 너는 유일하게 내가 창조한 희망이지. 나는 너를 기르며 아빠를 더 이해하고 집을 꾸리면서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내길 바랐어. 그런데 그건 내 머릿속에만 있던 이상이었나 봐. 외모가 못마땅하지 않아 늘 거울을 들여다보며 살았던 나는 임신하자마자 몸무게가 폭풍처럼 는다는 것에 첫 번째로 놀랐어. 두 번째는 배 한가운데에 검은 선이 생기게 되는 것에 놀랐지. 그게 차차 지워진다는 말을 들었어도 임신 이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선고처럼 느껴 마음이 서늘해졌단다. 진통은 말할 것도 없지. 창피와 무례를 무릅쓰고 의사의 멱살을 잡으며 제발 아기를 꺼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는구나. 문제는 내가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지. 놀랐니?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여러 종류의 부정적 감정과 싸우면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희망을 몸으로 길어 올리는 일이야.


너를 낳아 집에서 혼자 너를 돌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둘렸단다. 20년 넘게 썼던 나의 말들이 전부 증발되는 느낌으로 괴로워했지. 직장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박학다식하다는 고3을 가르치는데 이제 그 일이 불가능해지면 어쩌냐고 혼자 동동거렸어. 너는 한참 옹알이를 하며 아까 잠든 아가처럼 눈을 빛내며 나를 보는데 나는 너의 눈을 보지 않고 흐려지지 않는 임신선과 더 나빠지는 기억력에 너무 많이 겁을 냈어. 너를 집에 데려오고 나서 옆에 두고 읽었던 문학 교육 전공책이 있었단다. 우습게도 나는 이런 계산을 했어. 네게 분유를 먹이면 30분, 트림을 시키면 30분, 수유 간격은 2시간… 그렇다면 다른 집안일을 좀 놔두면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구나. 책을 읽어야겠다. 언제든 나는 임신 이전의 나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다. 결과가 어땠을까? 너는 종종 분유를 빨다가 잠이 들었어. 그런 너를 깨우려고 발바닥을 간질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기어이 먹게 하는 게 나의 일이었지. 사람의 위를 본 적이 있지? 원래 그렇게 꼬불꼬불하지 않다고 해. 아기일 적에는 위가 직선 모양이기 때문에 제대로 소화를 시키지 않으면 분유가 입으로 넘어온다는 주의를 받았어. 항상 트림을 잘 시키려고 노력했지. 그렇게 너를 안고 어르다 보면… 또다시 분유를 먹어야 할 시간이 닥치더구나. 믿을 수가 없었지. 아, 이렇게 계속 먹여야 한다고? 울면 그칠 때까지 안고 또 얼러야 한다고? 이건 내가 예상했던 엄마의 삶이 아니야! 좀 우습지? 엄마는 참 중요한 역할인데 아무도 출산할 때까지 실체를 알려주지 않으니 말이야.


나는 이 세상에 너와 완이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단다. 네가 손을 흔들다 원목 식탁에 우유를 쏟으면 신경질을 낼 수는 있어. 하지만 네 앞과 옆으로 너를 위협하는 것들이 지나갈 때 나는 계산하지 않고 나를 던져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 이토록 너를 사랑하지만 막상 너를 낳기 전에 내가 누렸던 모든 것-콘서트 가서 소리 지르기, 영화 보며 아빠 품에서 울기, 혼자 훌쩍 나가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기, 산책하며 낙엽을 책대로 모아 그러데이션하기-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것대로 서글펐지. 그 서글픔에 압도되어서였나.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20년 넘게 너를 기르며 너를 언제든 볼 수 있다는 당연함에 감사할 줄 몰라서였나. 안아도 울고, 업어도 울고, 어찌할 바 몰라 침대에 내려놨더니 온몸이 빨개지도록 화를 내던 네 옆에 주저앉아 나도 울고 있었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 내 목숨으로 너의 생명을 더 받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너, 그럼에도 적응이 되지 않아 너에게 화를 내는 현실에 얼마나 자괴감을 느꼈는지 몰라. 그래서일까. 지금 내 앞에서 맑은 눈을 가진 아이를 재우는 엄마를 보며 아이의 귀여움보다는 엄마의 축 처진 등이 눈에 밟혀. 꾸벅꾸벅 함께 조는 어른의 머리가 더 안쓰러워. 아마 저 사람이 기운과 힘을 다 써서 저 아이에게 흘려보낸대도, 어린아이는 어디서나 자라고 있는 법이니 엄마가 느끼는 유일한 고통을 알려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 가까운 사람이라도 육체가 다르면 잘 모를 거야. 아마 저 엄마는 그런 막막함에서 오는 고통까지 홀로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대신 아이를 재워주고 싶다는 마음까지 생겨나더라.


그리고

몹시 후회돼. 내가 저 아이를 보는 마음으로 너를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동그란 이마, 담백한 외까풀 눈, 누르면 쑥 들어갈 것 같은 앙증맞은 코를 지닌 너. 앞의 아기처럼 “으바바…어마마…”를 연신 말하며 내게 눈길을 줬을 때가 있었지. 내가 오지 않은 미래에 사로잡혀 떠는 바람에 어쩌면 너도 기억하지 못할 너의 쓸쓸했을 한 시절이 사무치게 그립구나. 내가 예전 같지 않다며 한탄하는 사이 너는 몸과 마음이 자라 어느덧 태권도 품새를 연습하고 각 장을 외우는 씩씩한 어린이가 되었는데 말이야. 시간을 앞당겨 네가 생후 5개월 즈음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네가 기억도 못할 만큼 빨리 자라서 어린이가 된다는 미래를 기억하고 있으면서 더 많이 사진을 찍을 것 같아. 그것보다 더 하고 싶은 게 있어. 저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 내가 했던 따뜻한 눈짓과 옹알이를 너에게 퍼부어 주고 싶어. 있지도 않았던 과거의 내 빛나는 20대 타령은 그만하고, 경력 중지 등을 끌어당겨 염려하지 않을 거야. 네가 내 몸과 분리되었고, 네가 살아나갈 미래는 내 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며 힘을 다해 너를 안아줄 거야. 더 많은 사랑의 노래와 자장가를 불러주고 네가 잠들 때 내쉰 고요한 숨의 향까지 기억할 거야. 여덟 살이 다시 되어도 5개월 때의 너를 생생히 기억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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