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예초'(聖譽鈔)에 따르면,
威德戀慕父王像
(백제) 위덕왕이 부왕을 연모하여
所造顯之尊像卽
만들어서 나타낸 존상이
救世觀音像是也。
구세관음상이다.
.
호류지 동원가람 몽전에 보관되어 있는
목제 구세관음상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 성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모습을 본떠 제작한 것이다.
나무 위에 금박을 입힌
이 목제 관음상은 높이 178.8cm이다.
나보다 4센티 크다.
녹나무로 만들어서 그 위에 금박을 입힌
이 목제 관음상은
실제 인물 기념 조각이다 보니
기존 추상적이고 양식적인 불상과는 달리
인간적이고도 자연스레 수염까지 모사한
사실주의 얼굴 모습이다.
성인 남성 큰 키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사실에 근거했다고 본다.
구세관음상의 실제 인물인 백제 성왕에 대한
인물됨과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이
이 위대한 예술품을 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왕은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에
더 많은 기록이 나오는 왕이기도 하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원서인 백제본기의 기록을
충실히 반영해 놓았다.
다만 일본서기 자체가
천황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제작된 서적이기 때문에
성왕을 긴메이 덴노 천황의 신하인 것처럼
기록을 해 놓은 점이 흠이다.
일본서기에는 성왕에 대해
과거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의 왕으로서
가야를 백제의 세력권에 넣고,
고구려에게 복수하려는
집념의 소유자로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에는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고
성왕을 긍정적으로 평하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며
성왕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성왕은
아버지 무령왕과 함께 대륙 백제의 중흥을 이끈
명군이자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한 것은
마침내 대륙의 마한을 완전히 복속해
아래에 두었다는
자신감이 원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에게 패해
전사함으로써
백제는 다시 혼란기에 빠지고
남부여란 국호는 사라지고 만다.
당시 성왕의 백제는
신민사관인 한반도에 국한된 백제가 아니라
22개의 담로를 거느린 대륙 백제로 봐야 된다.
위로는 고구리 장수왕을 상대해야 했고
아래로는 신라 진흥왕을
견재해야 했던 상황이다.
그러니 최후방 담로이며 지원 세력인
일본에 애착을 가졌다고 본다.
6세기 성왕 시기에 귀족 노리사치계는
일본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다.
위덕왕 시대에 대륙에서는
북방의 고구리 남하 정책으로
장수왕이 밀고 내려와 백제는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겨야 했다.
고구리를 방어하기 위해 가야와 합세하고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는 고구리로부터
땅을 획득한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신라와 관계가 틀어졌다.
위덕왕과 아버지 성왕과의 관계가 각별했지만,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덕왕은 신라와의 전쟁을 고집했다.
그래서
아버지 성왕이 관산성 전장 한복판에서
참수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참수형이란 머리가 잘리는 형벌이다.
그로 인해, 위덕왕은
평생 아버지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이것이 이 위대한 조각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객관적 시각에서 보자면,
백제도 당시에는 전성기였지만,
고구리의 광개토호태왕의 남하 정책으로 인한
장수왕의 침입과
김유신 같은 전쟁 불패 장수를 보유한
신라 사이에 끼여
결국 백제는 최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세계적인 예술품을 접했고
단아함의 정수와 화려함의 극치를 보았다.
작가로서
백제관음상과 구세관음상,
이 두 작품을 비교하는 것으로
근원적인 영감을 받고
소개하는 것에 대해
감사의 기쁨이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