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맥주 메르첸, 그리고 뮌헨 둥켈과 헬레스
뮌헨에서 긴 여름을 나기 위해 원래 만들던 것보다 진하고 세게 만든 특별한 맥주, 그러고는 남아서 10월에 옥토버페스트에서 해치워야 했던 맥주, 메르첸을 10월의 맥주로 소개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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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뮌헨의 평소 맥주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16세기 이전에 이미 세계 최초로 라거 계열의 맥주를 대중화시킨 곳, 이 곳에서 만들던 맥주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맥주의 수도 뮌헨에서는 먼 옛날부터 보리를 구수하게 볶고, 근처에서 생산되는 은은한 허브와 꽃 향을 머금은 '노블' 품종의 홉을 넣고, 시원한 알프스의 지하실에서 장기간(6~12주 이상) 숙성시켜 맛을 부드럽게 만든, 검고 시원한 "뮌헨 둥켈" 맥주를 주로 마셨습니다. 방금 한 문장으로 요약한 이 과정은 지금도 맥주를 만드는 가장 정석적이고 기본적인 과정입니다. 뮌헨 둥켈 맥주는 보리를 술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을 따라, 특별한 첨가물이나 특징 없이 만든 이름 그대로의 '맥주' 그 자체였습니다.
둥켈Dunkel은 영어의 dark에 해당하는 독일어입니다. 독일어로 쓰면 그럴듯해 보이는 이름이지만, 번역하자면 '어두운 것' 정도의 이름인 셈입니다. 그렇다고 어둡지 않은 맥주가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맥주의 재료가 되는 보리에 싹을 틔운 후 잘라내는 과정과, 높은 온도에 볶아 맛과 향을 증진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보리를 맥아로 가공하는 '맥아화' 과정을 거쳐야만, 발효가 원활히 이루어지고 보리의 맛도 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세계 어느 곳을 불문하고 보리를 볶는 온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기술이 없어서, 보리가 까맣게 타버리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따라서 세상 모든 맥주는 어두웠고, 뮌헨 사람들 또한 맥주를 가리켜 '어두운 것'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뮌헨 둥켈 맥주는 '보리로 만든 술'로서의 맥주를 가장 충실히 이행한 표본입니다. 오늘날에는 맥주를 질리지 않고 많이 마실 수 있도록 종종 보리보다도 쌉쌀한 홉의 맛이 강하게 나는 경우가 많은데, 뮌헨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홉을 최소한으로 넣고, 보리의 고소한 맛을 살리는 데에 집중한 것입니다. 이에 더해, 보리를 어둡게 볶는 과정에서 약간의 카라멜 향, 고소한 견과류와 같은 향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맥주는 어둡다는 사실에 첫 변화를 꾀한 것은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독일만큼 맥주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사실은 에일 계열의 맥주를 꽃피운, 맥주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나라입니다. 영국에서는 코크스cokes라는 연료를 사용해, 장작과 지푸라기를 이용하는 것보다 보리를 덜 타게 볶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800년을 전후해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이 연료가 보다 보편화되자, 이 기술을 이용한 비교적 밝은 색깔의 페일 에일pale ale이 영국 맥주 시장의 주도권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페일 에일에 관한 더 길고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 맥주를 머지않아 그 달의 주인공으로 선정하게 될 날로 미루어야겠습니다.
페일 에일에 큰 영감을 받은 양조가 두 명이 유럽 대륙에 있었습니다. 바로 뮌헨의 가브리엘 제들마이어Sedlmayr와 오스트리아의 안톤 드레어Dreher였습니다. 제들마이어는 1841년, 새로운 기술로 만든 '뮌헨 맥아'를 사용해 종전의 둥켈보다 획기적으로 밝은 색의 맥주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고, 이 맥주를 그 해 옥토버페스트에 내놓았습니다. 여름 내내 마시다 남아서 소모하는 맥주에서 옥토버페스트를 위해 일부러 만든 맥주로, 이 맥주는 메르첸Märzen의 방향성을 새로 잡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맥주, 메르첸은 아직,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그다지 밝은 맥주는 아니었습니다. 붉은 빛을 띠는 어두운 갈색에 가까웠습니다.
제들마이어의 친구 드레어는 몇 달 지나지 않아 보리를 '뮌헨 맥아'보다도 밝은 색깔로 볶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비엔나 맥아'를 사용한 이 맥주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발전해,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에서 흔히 마시는 비엔나 라거Vienna lager 스타일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맥주를 더 밝게 만들려는 시도를 한 것은 두 사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역시 바이에른 지방의 양조가 조제프 그롤Groll은, 체코의 작은 마을 플젠Plzen에서 '우리 지역의 맥주를 살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체코로 떠납니다.
그렇게 1842년 개발된 체코의 필스너 맥주는 당시 어디에도 없었던 청량감과 깔끔함을 앞세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유럽 각 지역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들던 다양한 맥주를 사장시킵니다. 특히, 필스너 맥주는 비엔나 라거보다도 밝은 색으로, 요즘 맥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밝은 황금색을 띤다는 점이 그 인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뮌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자칫 자신들의 맥주에 안주하다가는 필스너의 물결에 휩쓸려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뮌헨 사람들에게 그들의 맥주는 단지 음료의 색깔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수백 년을 지켜온 뮌헨 사람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뮌헨 둥켈, 그리고 메르첸, 보리를 어둡게 볶아 고소하고 달큼한 맥주는 이미 그들의 문화유산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제들마이어의 자손들이 슈파텐Spaten 양조장에서 필스너의 유행에서 비롯된 시대의 요구에 따라 필스너 만큼이나 밝아진 뮌헨 헬레스Helles 맥주를 선보인 1894년, 많은 뮌헨 사람들은 필스너의 인기에 전통이 꺾였다며 개탄스러워했습니다. 헬레스Helles는 둥켈Dunkel과 반대의 의미, 즉 '밝다'는 뜻의 독일어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밝아진 뮌헨 맥주, 뮌헨 헬레스는 더 밝은 맥주를 원하는 시대적 요구에 대한 모범답안이었습니다. 필스너만큼이나 밝아진 맥주, 하지만 뮌헨 둥켈의 전통을 이어받아 홉의 날카로운 쓴 맛보다는 보리의 푸근한 달큼함이 들어있는 새로운 '뮌헨 라거'를 곧 여러 양조장에서 도입하면서, 헬레스는 뮌헨의 대표적인 맥주로 자리잡았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자존심을 버리고 전통을 개량해 만든 이 맥주 덕분에, 역으로 뮌헨의 전통 맥주를 아직까지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헬레스 맥주 덕분에 뮌헨에서는
밝은 색 맥주의 세계적인 트렌드에 발맞추면서도,
오랜 뮌헨 맥주의 전통을 이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뮌헨 둥켈과 비슷하게, 뮌헨 헬레스 맥주는 수백 년 전부터 만들어왔던 가장 기본적인 스타일의 맥주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맥주는 대개 체코에서 만든 필스너 계열로, 뮌헨 맥주, 혹은 가장 기본적인 맥주보다 홉을 더 많이 넣어 쌉쌀한 맛을 키우고 더 청량하게 만드는 등 대중들의 수요에 맞게 발전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뮌헨 헬레스 맥주는 요즘 입맛에는 다소 싱겁고 눅눅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뮌헨 맥주의 특징은 맥아에서 미처 발효되지 않은 당 성분이 많이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보리, 그리고 맥아가 가지고 있는 당 성분을 효모가 먹어치우고 알코올을 만들어내는 것이 발효의 과정인데, 이 과정이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아 결과물인 맥주에도 당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한편으로는 달달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눅눅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맥주의 맛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가 맥아, 즉 보리에서 나오는 당 성분의 고소함과 달큼함, 그리고 그 눅눅함을 씻어주는 홉의 쌉쌀함과 탄산의 청량감의 균형인데, 여기에서 전자가 다소 강화된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풍부한 맥아 함량에서 오는 고소함과, 맥아의 단백질 성분이 주는 입 안이 가득 차는 '바디감', 그리고 자극적이지 않으며 향긋한 홉 향 등의 장점을 내세워 뮌헨 맥주에 열광합니다. 저 또한 이 맥주야말로 "맥주가 원래 무슨 맛이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답을 주는 맥주이며, 고소하고도 달달한 맥아의 맛을 은은하게 느끼면서도 시원하게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매력적인 맥주이기에 한 번쯤은 꼭 마셔봐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축제를 위해서라는 한정적인 용도가 있는 메르첸보다는, 뮌헨 둥켈과 헬레스를 찾아보기가 조금 더 쉽습니다. 뮌헨에 소재한 양조장들은 둥켈과 헬레스 정도는 기본으로 라인업에 갖추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대표적으로 호프브로이Hofbräu, 뢰벤브로이Löwenbräu, 바이헨슈테판Weihenstephan, 아우구스티너Augustiner 등의 헬레스 맥주가 국내에 수입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양조장들에서 헬레스는 주로 오리지날Original(독일어니까 오리기날이라고 읽어야 하나 싶습니다) 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며, 라벨에 hell, helles 와 같은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100%입니다. 둥켈은 정직하게 dunkel 이라고 써져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뮌헨은 밀맥주로 또한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자칫 라벨에 밀맥주를 뜻하는 바이쎄weisse, 혹은 바이젠weizen과 같은 표현이 있다는 사실을 놓친다면 뮌헨 라거와는 전혀 다른 뮌헨 밀맥주를 드시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뮌헨에 위치한 슈나이더 바이쎄Schneider Weisse에서 만드는 "Mein Original" 맥주는 헬레스가 아닌 밀맥주입니다.
종로와 마포를 비롯한 서울 몇 군데에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라는 맥주집이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옥토버페스트를 콘셉트로 한 곳으로, 실제로 독일에서 유학한 국내 1세대 브루마스터가 만든 독일식 맥주를 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홀 직원들의 복장부터 분위기까지 옥토버페스트를 모방한 곳인데요. 옥토버페스트라는 가게 이름에 비해 옥토버페스트 맥주인 메르첸이 없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뮌헨 맥주의 특징을 잘 살린 뮌헨 둥켈 맥주를 판매합니다. 1L짜리 마쓰Maß 잔을 만날 수 있는 것과, 다른 수제 맥주 전문점에 비해 저렴한 가격이 장점입니다.
이 글의 커버사진은 기네스와 호가든을 섞은 맥주 칵테일, 이른바 '더티 호'입니다. 두 맥주는 뮌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사진에서 보시는 검은색, 붉은 갈색, 그리고 노란색은 각각 뮌헨 둥켈, 메르첸, 그리고 뮌헨 헬레스의 색깔과 매우 일치합니다. 뮌헨 맥주의 색깔이 밝아지는 과정을 한 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색깔, 많이 익숙하실 것 같습니다.
프랑스 국기(왼쪽)의 파랑, 하양, 빨강은 각각 자유, 평등, 박애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한편, 독일 국기(오른쪽)의 검정, 빨강, 노랑은 각각 둥켈, 메르첸, 헬레스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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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농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