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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 Mar 29. 2024

[책] 심연에 질문을 던지면 심연도 답을 던진다

최진영 <원도>

(약한 스포가 있습니다.)


구멍.


읽는 내내, 읽고 난 뒤 계속해서 머리에 맴도는 단어이자 이미지였다.

시커멓고 커다랗지만 또 그렇게 커다랗지는 않아 메울 수 있을 것 같아도 결코 메워지지 않는 구멍.

즉, 공허.


무언가를 끊임없이 좇았던 원도.

한 번도 충만한 적 없었고

늘 박탈당해 있었고

또 그렇다고 생각했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대상으로 박탈했던 인간

고독하고 늘 혼자였던, 스스로가 스스로를 혼자라는 공간에 처하게 했던 인간.

원도는 “죽고 싶지 않았다.”(81쪽) ‘왜 죽지 않았는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죽음에 관해 생각했지만, 정작 원도는 살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거 궁금했을 뿐이다. 나는 왜 지금 피를 토하며 이 추운 여관방 바닥에 쓰러져 덜덜 떨고 있는 인간이 된 걸까.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누가 시작한 걸까. 왜, 나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삶을 중단하지 않았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날것의 말들에 읽기 힘들었고 괴로웠다. 적나라하게 처참한 원도의 생각과 생각을 듣고 있노라면 나까지 휘말려 들어가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작가님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쓰는 동안은 힘들지 않았다.
소설이 내게 복수하듯 글을 끝내자마자 힘들어졌다.
(…) 
마지막 글자에서 눈을 떼자마자 너무 무섭고 외로워서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초판 작가의 말, 242쪽)


작가님이 정말 어떤 상태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쏟아내듯이, 뱉어내듯이, 토하듯이 쓴 듯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 문장 한 문장,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전혀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원도를 나열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가’라는 문장은 ‘이렇게 계속 사랑해도 되는가’라는 문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핍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넘쳐흘렀다. 언제나 흐르고 있었다. 이 소설은 어쩌면 흐르는 그것을 잠시라도 막아서 내 안에 가두어보자는 안간힘이었는지도. 이 소설을 들여다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그때 원도의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다음 질문으로 건너갈 수 있었음음.”
(새로 쓴 작가의 말, 247쪽)


결국을 들여다 보아야만 하는 구멍이었던 것이다. 내가 구멍과 그 안을 들여다보며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야 그 구멍도 나를 보고 죽이 되는 밥이 되든 아무말이 되었든 어떤 답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원도는 용감한 인간이었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공허와 마주했고 끊임없이 물었고 끊임없이 답을 구했다. 답을 얻지는 못했을지라도 결국 그는 결심을 했다. “나 혼자“(241쪽)지만 방으로 들어가기로. 다시 죽지 않기로.


죽어야겠다는 생각과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같은 무게로 시소의 양 끝에 앉아 있고, 원도는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일지 선택하지 못한 채 그 중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생각은 무게가 없다. 유령처럼 존재하는 그것은 유령처럼 사람을 홀린다.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들릴 듯 들리지 않는 숨소리,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림자, 잡아먹었는데날뛰고엄마가쿨럭쿨럭심장도불쌍한비명이때리면서사악한폭발해버렸지태양을새하얀어둠과차가운눈물처럼, 규칙도 의미도 경계도 없는 요설로 존재를 지배한다. 시소는 기울지 않을 것이다. 사진에 박힌 풍경처럼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치않는 그것이 그곳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원도는 자유로울 수 없다. 기울지 않은 시소를 보며 기울었다고 믿는 순간, 원도의 몸도 한쪽으로 기울고 동시에 버튼은 눌릴 것이며, 순식간에 원도는 달리는 덤프트럭으로 뛰어들 수도 있다. (42쪽)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져라. (58쪽)

→ 일견 살면서 필요한 자세처럼 들리지만, 꽤나 잔인한 말이기도 한. 


그런 생각을 하며 원도는 억울함과 죄책감과 서러움이 뒤범벅된 감정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63쪽)

→ 왜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지.


욕심 없이, 기대 없이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죽음은 결과이며 삶은 과정이고 욕심이나 욕망은 그것을 움직이는 연료라고도 할 수 있으니, 적당한 욕심과 욕망이 있어야 삶도 진행된다는 식으로 뻔하고 무책임하게 말할 수도 있다. 물론이다. 하지만 그런 하찮은 정의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 오직 돈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돈 너머 무언가가 있다. 항상 그 너머가 있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무엇을? 나는 확실히 그렇다는 것을. 확실히 그런, 무엇을? 모든 것을 누릴 만하다는 것을. 모든, 무엇을? 지위를. 어떤 지위를? 그 모든 것을 누리는 지위. 그, 모든, 무엇을? 가진 자로서. 무엇을 가진 자? 돈과 명예와 사랑, 아니 모든 것을.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누리는 무엇을? 뒤죽박죽된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원점에 당신이 있다. 당신을 가리키지 않는 한 모든 대답은 어긋난다. 오직 당신이다.
(…)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 생각하지마.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건 가짜야. 생각을 낭비해서 스스로를 속이는 거지. 솔직하게 말해봐. 고상한 척하지 말고. (89~90쪽)


인간의 마음에는,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 중심에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어떤 공간이 있는데, 아주 사소한, 빗방울 하나보다도 작은 공간이 있는데,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딱딱한 맨틀 같은 것이 둘러싸고 있어서 무엇도 그 중심에 닿을 수 없고, 닿을 수 없으니 채울 수도 없고, 그래서 그 공간은 텅 비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닿을 수도 채울 수도 볼 수도 없지만 그곳에 있기에 분명 느껴지는 그 빈 곳은 결국 저주이고, 신이 인간을 완벽하게 사랑하기보다, 사랑하면서도 증오하여 만든 마음의 구멍이고, 하얀 백지에 점 하나를 찍듯 충동적으로 만들어버린 그 공간 때문에, 그 공간을 견딜 수 없어서, 그것을 느낄 때마다 외롭고 무섭고 불안해서, 균형이 맞지 않아서, 자꾸 기울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원하던 것이 그 구멍에 맞지 않는 것만 같아서 버리고, 버리기도 전에 다시 다른 것을 원하고, 형태 없는 빈 공간에 꼭 맞는 조각이란 애당초 있을 수 없는데, 반드시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찾아 헤매고, 배신하고, 질투하고, 탐하고, 죄를 지으면서 그것을 채워야, 채워 넣어야 이 불안, 이 고통, 이 고독도 사라질 것 같아서, 누구도 한곳에, 어느 한 자리에 영원히 머무르지 못하고, 신이 인간을 증오하듯 서로를 증오할 수밖에 없고, 단번에 충동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랑한다 믿을 수밖에 없고 다시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미친 듯이 찾아 헤매다 결국 죽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죽는 순간에도 그것을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은 원래 없는 것이라고, 태어나는 순간 형성된 상처, 보고 듣고 느끼고 굳고 마모되며 세상을 견디는 대가로 아물어가는, 구멍이나 통로가 아닌 흉터인데, 채울 수도 채울 필요도 없는데, 그런데 어째서 죽은 아버지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족스럽다는 글을 남겼는지, 그럴 수 있었는지, 그것이 과연 진심인지, 진실인지, 죽은 아버지는 정말 만족하며 만족스럽다는 글을 남겼는지, 만족스럽다면서 왜 죽었는지, 내가 말하는 만족과 그가 말하는 만족이 과연 같은지, 죽은 아버지가 느낀 만족이란 대체 무엇인지 (…) 그렇지만, 그렇더라도, 만족스러웠던 순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찰나여서 거짓말 같을 뿐. 그런 순간도 있었다. 마음 한가운데, 빗방울보다도 작은 그 공간이 채워졌다 믿었던 순간. 아니, 그 공간이 사라졌다 믿고 싶던 순간들. (91~93쪽)

→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


그런 식으로, 어른이 될수록, 원도는 조각조각 나뉘었다. 알뜰한, 게으른, 조용한, 성실한, 똑똑한, 무식한, 사려 깊은, 부지런한, 친절한, 둔한, 멍청한, 술을 잘 마시는, 술을 못 마시는, 거만한, 수줍은, 신경질적인, 냉정한, 용감한, 무책임한, 충동적인, 겸손한, 밝히는, 예민한, 수다스러운, 건강한, 허약한, 미숙한, 가식적인, 명석한, 우유부단한, 욕심 많은, 과감한, 집착하는, 음흉한, 단순한, 비겁한, 소심한, 정직한, 이타적인, 이기적인 원도.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원도만 봤다.(122~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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