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도 Aug 14. 2021

라면


라면은 역시 조금 덜 익은 상태로 꼬득하게 먹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라면 봉지에 쓰인 '몇 분 끓이세요' 하는 가이드보다 40초 정도 일찍 불을 끄는 방식으로 주욱 라면을 끓여왔으니까. 물이 끓기 시작할 때부터 동글동글했던 라면이 고불고불하게 풀어질 상태를 하면 사실 그때부터 벌써 마음이 급하다. 3분이 인생에서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닐 텐데. 면이 사라락 풀어질 때 손가락을 틱틱 튕기며 어림짐작으로 시간을 세는 것도 참 오래된 버릇이다. 평소엔 성미가 급하지 않은데, 라면을 끓일 때만은 조금 조급해진다. 묘한 의외성. 특별히 급한 성격이 아닌데도 라면이 익을 때까지의 몇 분이 꽤나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누군가 물으면 라면을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길게 느껴진다고 TMI를 쫑알거리고 싶을 정도니까. 


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아무것도 아니어서 그 자체로 온전히 순수한 액체가 끓는점을 만나 보글보글 끓는 걸 보고 있는 것도 좋지만, 스프를 탁 탁 털어 넣었을 때 물의 색깔이 보란 듯이 변하는 걸 보면 매력적이네, 싶어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렇게 뜨거워진 냄비에서, 찬란하게 살아남은 고불고불한, 마치 뫼비우스의 띠가 이어지고 이어져 있는 것 같은 그런 길쭉한 존재가 본연의 모습을 잃거나, 아니면 찾아가면서 흐물거릴 때, 나는 취향껏 그 띠를 구출할 시간을 손가락으로 팅 팅 하고 세는 거다. 고불고불한 라면을 좋아하는 나는, 면이 다 풀어지기 전에 그릇으로 보기 좋게 건져낸다. 마지막 국물을 따르고, 한 입을 넣기 전까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담긴 그릇에서, 구출된 면들을 호로록 먹어치운 후 국물만 남았을 때 또 다른 선택지가 남는 것도 '라면'의 매력이다. 적당히 식은 밥을 말아먹을까, 말까. 고민하면서 괜히 남은 국물을 한 번 떠먹을 때.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원하는 걸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채는 그때. 결국 뽀오얀 밥을 반 주걱 그릇에 퍼넣고 마는 그 순간들을 참 많이 아낀다. 남은 국물 한 스푼까지 깔끔하게 먹어치우곤, 혈중 나트륨 농도가 진득하게 차오르는 걸 느끼며 숟가락을 놓는 순간까지.  



이전 08화 된장찌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