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마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웅성 Aug 24. 2023

슬픔의 시작

내가 나이지 못했던 순간의 첫 기억

나는 삼 남매 중 둘째이다.

언니의 출생은 귀하고 가치로웠다. 언니 위로 두 명의 아이가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난 후 태어났기 때문이다. 한 명은 배곯아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 한 명은 굳은살 박인 친할머니 손이 잘못 감지한 뜨거운 온도의 물에 자지러지게 울다 그날 밤 죽었다고 한다. 먹지를 못해 기운 없어 잘 울지도 않던 아이가 그렇게 자지러지게 울더니 그날 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엄마는 언니를 낳으러 가기 전, 아버지가 힘들까 봐 새벽녘에 가진통이 오는 배를 붙잡고 연탄 불씨를 집집마다 배달하고 병원을 향했다고 한다. 당시는 연탄 불씨를 배달하는 일이 있었다. 낮에는 연탄을 배달하고 새벽에는 시장 상인들이 하루를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주문한 연탄 불씨를 연탄화덕 안에 넣어주는 일이다. 훗날 어린 시절 나의 놀이터가 되었던 대신시장은 부모님의 일터였다. 출산 후 엄마는 당일로 퇴원해 또 연탄가게 일을 도왔다고 한다.


죽지 않고 잘 살아줘 다행이었지만, 어려부터 언니는 입도 짧고 성질도 날카롭고 예민해 살이 붙을 틈이 없었다고 한다. 삐쩍 마른 몸에, 시커머 퉁퉁한 피부, 예민한 성격은 어린 시절 언니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러다 2년 후 내가 태어났다. 나는 자라면서 줄곧 들어왔다. 다들 아들일 거라 했다고, 아들일 줄 알고 낳았더니 섬머슴 같은 딸이라고. 태몽도 언니는 탐스런 과일, 남동생은 보석인데, 나는 터진 홍시. 그것도 자갈밭을 걷다 발견한 감나무에서 다 익은 감들이 바닥에 떨어져 터져 있더라고 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솔직할 때는 솔직해야 하지만, 솔직하지 않은 편이 나을 때는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것도 한 생명을 구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자갈밭 얘기는 차라리 하지 말지, '터진'은 좀 빼고 얘기하지.

 

2년 후 남동생이 태어날 때 이미 엄마는 다섯 번째 출산을 하는 것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이번에는 꼭 아들이어야 한다고 경상도에 계시는 외할머니까지 상경하여 엄마에게 날짜를 점지해 주고 갔더란다. 외할머니가 철석같이 믿고 계시는 주지스님이 점지해 주신 날은 아들 들어서는 날이 맞았던가 보다. 그렇게 남동생이 태어났다.


약하디 약한데 이번만은 살리리라는 각오로 키운 언니, 귀하게 얻은 아들인 남동생, 그리고 아들일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딸로 태어난 나.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눈치로 분위기를 읽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태성이 그런 건지, 사랑받기 위해 애썼던 것 같다. 어른들에게 잘 보이려고 밝고 싹싹하게 굴고, 어른들이 좋아하시니까 싫어도 나미의 빙글빙글 안무를 따라 추고, 동네 또래 오빠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어른들이 재밌어해서 한 술 더 떠 오빠의 부모님을 시어머니, 시아버지라고 부르고, 어른들이 웃어 보이면 그 걸 연료 삼아 더 밥도 잘 먹고 씩씩하려 노력했다.


부모님을 실망시킨 첫 기억이 있다. 유치원 재롱잔치. 동네에서는 그렇게 씩씩하던 아이가 유치원만 가면 현관부터 안 가겠다고 울어 젖혔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울며 버티기를 아주 오랫동안 한 기억이 있다.

일 년이 지나고 겨울, 유치원 졸업식과 함께 재롱잔치가 있는 날이었다. 유치원에서 나는 통 말이 없는 아이였는데, 재롱잔치를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다를 없었다. 말을 안 해 의견을 내지 않으니 나에게 배정된 것은 부채춤.

말이 없던 아이였지만, 유치원이 돌아가는 상황은 다 관찰하고 있었다.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과 예쁘고 다정하신 선생님에 대한 나름의 선호도 갖고 있었다. 부채춤 담당 선생님은 호랑이 선생님.

나는 준비 기간 내내 예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에어로빅을 준비하는 아이들이 내심 부러웠다. 내가 하도 말을 안 하고 부채춤을 안 추려하니 호랑이 선생님이 무섭게 혼내면서 다른 거 하고 싶으면 말하라고 하는데, 나는 고개만 떨군 채 말하지 못했다.


재롱잔치 날이 되었다. 생전 처음 화장이라는 것을 하고 고데기로 엄마가 머리를 말아주고. 집에서는 한껏 신이 났다.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거울 속 나를 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차례를 기다려 부채춤 순서가 되었다. 나름 무대체질이던 나는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는 걸 좋아하다 보니, 조용한 아이라는 타이틀은 잊고 열심히 춤에 합류하고 있었다. 빨간 립스틱 바른 입술만큼이나 내가 돋보이고 싶었다. 화려한 부채를 활짝 펼쳐 둥근 꽃대형을 한차례 마무리 하고 내 위치로 돌아왔을 때, 무대 아래 서있던 수많은 학부모 관중을 뚫고 앞자리에 선 아빠가 보였다. 아빠는 공연이 시작하고 늦게 오셨는데, 나는 아빠를 보고 왜 눈물이 났을까. 엄마였다면 어떤 모습이어도 마냥 좋았을 것 같다. 그런데 엄마가 아니다. 아빠가 오셨다. 그리고 우리 아빠는 남색 작업복 점퍼를 입고 계신다. 주변 어른들이 남자고 여자고 모두 깔끔한 정장 차림인 것과 대비되는 아빠의 낡은 점퍼. 나는 그만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꼼짝도 않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내내 그 자리에 서서 울고만 있었다. 선생님과 관중들은 웅성거렸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굳었는지 도무지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재롱잔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아빠는 화가 나 계셨다. 추운 겨울 가로등이 비추는 골몰길을 아빠 옆에서 걷는데, 내 마음이 더 추웠던 것 같다. 게다가 선물을 잃어버렸다. 마침 크리스마스 날이 가까워 재롱잔치 끝 시간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하나씩 나눠주셨는데, 나는 노트와 연필세트를 받았던 것 같은데, 군중 속에서 놓친 걸까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 손에는 선물이 들려있지 않았다. 아빠는 추운 골목길에서 추운 한 마디를 하셨다. 바보 멍청이라고.


아빠를 실망시킨 또 한 번의 사건이 있었다.

당시는 주말이면 목욕탕을 갔는데, 겨울에는 그 주 1회가 목욕의 전부였던 것 같다. 그 외 계절에는 가게 앞 길가에 정화조만 한 빨간 다라이에 물을 가득 담아 삼 남매가 한꺼번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집안에는 씻을만한 곳이 마땅치가 않았던 탓이다.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오히려 웃으며 한 마디를 던지는 사람들은 괜찮았다. 삶의 희극요소로 우리를 봐주는 게 차라리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무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들을 보면 물속으로 숨고 싶기도 했다. 내 얼굴에 가난, 불쌍함이라는 명찰이 달리는 것 같았다.


여느 주말과 다름없이 목욕탕을 가야 하는 겨울의 한 주말. 엄마와 아빠가 목욕탕을 어떻게 할지 얘기를 나누시는 게 보인다. 당시 8살이던 나는 엄마와 아빠의 얘기 틈을 타 끼어들어, "그럼 내가 아빠랑 가면 되지!"하고 호기롭게 외친다. 그때까지만 좋았다. 부모님이 좋아하셨고 씩씩하다고 칭찬해 주셨으니까.

아빠 손을 잡고 목욕탕으로 향하던 골목길에 접어들자 제정신이 들었나 보다. 가기 싫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보통은 싫어도 부모님이 원하면 그냥 했는데, 그날은 안될 것 같았다.

"아빠, 나 아빠랑 안 갈래."

아빠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설득하시다가 한 마디 하셨다.

"바보 멍청이"

난 그렇게 두 번째 바보 멍청이가 되었다. 잘해보려 했던 시도들은 끝내 바보 멍청이가 되었다.


선뜻 나서서 내가 할게라고 말하는 것이 끝난 사건이 있다. 아홉 살이던 그해, 그 일 이후로는 내가 할게라고 나서지 않았다. 겨울밤이었다. 추운 겨울은 사람이 모여 함께 나누는 온기가 유난히 더 따뜻하다. 마침 또 신나는 토요일 밤이었다. 당시는 주 6일제였기에 토요일 저녁이 지금의 불금에 해당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신혼살림을 우리 집 근처로 잡은 외삼촌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은행을 다니시던 외숙모가 출장을 가셨다고 한다. 재미난 저녁시간을 보내다 삼촌이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빈 집에 혼자 가기 싫다며 조카들과 함께 가고 싶어 하셨다. 셋이 같이 가자 하셨는데, 언니와 남동생은 싫다고 엄마랑 잘 거라고 했다. 나도 한참을 싫다고 엄마랑 자겠다고 했다. 삼촌이랑 자는 건 왠지 싫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래 싫다고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바나나를 주겠다고 한다. 당시 바나나는 고가의 귀한 음식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바나나를 먹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바나나도 싫었다. 엄마가 더 좋았다. 그런데 먹돌이라는 별명으로 잘 먹는 나를 보며 어른들이 좋아하는 분위기가 기존에 형성되어 있던 터라 "바나나다. 먹을 거다. 먹돌이가 먹을 걸 마다하겠나." 하는 어른들의 반응에 '그래, 나는 먹돌이. 씩씩한 먹돌이. 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지.' 하며 결국 삼촌을 따라나섰다. 따라나서면서도 엄마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가기 싫으면 가지 마라 마.' 하며 나를 불러줘, 엄마.


삼촌 집에서 바나나를 한 개 먹고, 평소와 달리 삼촌과 단 둘이라는 어색함을 느끼며 쭈뼛쭈뼛 거리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녘이었나. 사위가 온통  깜깜한데 눈이 뜨였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모로 누워 자는 나의 등 뒤에서 삼촌이 나를 껴안고 자고 계신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난다. 그 순간 나는 움직일 수 조차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한참을 그 자세 그대로 얼어있느라 숨조차 살살 쉬었다. 내 허리춤에 단단한 무엇이 느껴졌는데, 그것이 삼촌 몸의 일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생각한 것 같다. 아무것을 하지 않아도 남자는 무서울 수 있는 존재이구나.


바나나 한 개에 이런 상황을 겪는 나를 향해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바보 멍청이. 싫어도 하고야 마는 바보."

그렇게 나는 세 번째 바보 멍청이가 되었다.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것이 생겼고 경계심이라는 것이 생겼고 다소 말수가 줄고, 하기 싫은 걸 하라고 종용할 때 슬픔이라는 감정이 잉크가 물에 번지듯 마음속에 퍼져가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부채춤을 추다 왜 멈추고 서 울고만 있었는지, 왜 아빠와 목욕탕을 간다고 했다가 안 가려 했는지, 왜 그 겨울밤 먹은 바나나가 그렇게 슬펐는지. 그저 말수가 좀 줄었고, 슬픔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다. 뭐 그 상황들에 대해 내 마음을 물어봐주는 사람도 없기는 했다. 그렇게 나는 내 문제를 혼자 안고 갔다. 왜 그 모든 일은 겨울에 일어났을까.






#아홉 살 인생 #어린 시절 #기억 # 바보

#라라크루



매거진의 이전글 생선뼈 발라먹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