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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Dec 15. 2022

하루맞이

그제는 제주 올레 16코스를 걸었습니다

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르고

토성을 지나 또 마을로,

마을을 지나 또 산으로,

산을 지나 바다에 이르렀습니다


어제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누런 옻지 위에 먹선 하나하나 그리니

꽃이 피고 잎이 돋고 열매가 맺혔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눈이

다소곳이 내립니다

커피 한 잔을 내려 눈 앞에 섭니다


눈이 별거겠어요

산이 별거겠어요

바다가 별거겠어요

그린다는 일이 별거겠어요


별거 아닌 곳에서

눈을 뜨는  일,

바라보는 일,

숨가쁘던 순간을 떠올리고,

너울 치는 삶의 파도 앞에서

눈물 떨구던 때를 떠올리다,

바다 앞에 선 나는

바다를 지긋이 바라 봅니다


삶의 언덕을, 산길을, 바다를

내가 그려왔던 나의 그림을 바라봅니다

바람에 날리는 눈송이처럼

입 다문 고요한 수용을,

요동치지 않는 차분한 겸손을,

커피잔에 담아 얌전히 삼켜봅니다


파도의 박자처럼

삶은 몰아치고 쉬어가고,

눈 덮여 하얘진 세상이

다시 녹아 제 모습 보이고

또 눈은 내리고 녹고,

길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고,

잔은 채워졌다 비워지고,


오고 가는

오르고 내리는

나타났다 사라지는

피었다 지는 일 속에서

조용히 의미를 바라보는 일,

내가 오늘을 또 걷는 이유입니다


200년 전 푸코는 판테온 돔에

68미터의 긴 실을 내려 28킬로의 추를 달아

지구 자전을 증명했고,

오늘의 나는 진화하는 풍경 속에

생의 본능을 내려 삶의 무게를 달고

뜨는 해에 오르고 지는 해에 내리며

하루의 의미만큼 다소곳해진 마음으로

다시 뜨는 해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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