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정신분석론 -원초적 본능 이드-
뇌나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 중 프로이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의 자아를 크게 세가지로 분류한 사람이다.
또한 성 심리 발전의 관하여 글을 써서 성욕에 대한 억압으로 인해 히스테리와 노이로제같은 정신질환을 유발한다는 것을 밝혀 내기도 했다. 이로 인해서 프로이트는 성욕 만능설을 주장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사람의 자아는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다.
폭력과 성욕 등, 원초적인 본능인 이드와
두려워하고 회피하며 이익을 계산하는 합리성의 에고
존중받기 위해 상대를 존중하고, 종교와 법을 만드는 이기적인 이타심의 슈퍼에고가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드에 관해서 중점적으로 써 볼 생각이다.
원초적 본능 중 하나인 폭력성은 동물의 본능 중 하나로써 복합체를 가진 동물이라면 모두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 된다. 배가 고프니까 음식을 먹으며, 음식이 없으면 상대에게서 빼앗는다. 사냥한다 등의 기본적인 욕구를 추구하는 자아가 바로 이드다.
만약 이러한 원초적 폭력이 없고, 배가 고파도 움직이지 않으며, 음식이 없으면 그대로 굶어죽는 종이 있다면 지금까지 유전자를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사람이 경쟁하며 빼앗고, 타인의 위에 있고, 승리함으로써 세로토닌 호르민을 얻으며 행복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id 안에서도 더 작게 분류하자면 리비도 (libido)가 있다. 성욕 추구의 정신 에너지라고 정의가 되어있는데, 그냥 성욕과 성충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프로이트는 이를 자생적 정신 에너지라고 했고, 카를 융은 더 나아가서 생명의 에너지라고 까지 해석했다.
동물이 사냥하고, 음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살아가는 모든 행위들은, 결국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도 이 의견에 대해서 동감한다.
뭔가 생명의 에너지라고 표현하니까 철학적인 느낌도 나는 것 같다. 그럴수밖에 없는 게 심리학이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철학과 그것을 증명하는 과학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인간이 더 잘 살 수 있기 위함이다. 그것이 철학, 과학, 심리학, 법, 도덕의 존재 이유이다.
가끔씩 인간의 폭력성과 성욕 자체를 부정하고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위에 서술했다시피 동물은 모두 폭력성과 성욕을 갖고 있으며 인간은 문명화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게임 속에서 폭력을 즐기고, 잔인한 영화를 보거나 공포영화 속 주인공이 도망다니는 것을 보며 긴장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악당이 고통받고 죽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느끼거나, 길거리 펀치 기계를 치며 스트레스를 발산하는 것이 사람이다. 당신이 싸이코패스여서가 아닌, 인간이자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슈퍼에고의 도덕과 법이 없는 인간은 그저 동물과 다를 게 없는 거다. 성선설은 틀렸다. 사람이 정한 선과 악을 기준으로 보자면 성악설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사회화로 인한 법과 도덕의 슈퍼에고는 이드와 가장 큰 충돌이 일어나는 자아이기도 하다.
과도한 오류의 슈퍼에고는 사회에서 폭력적인 게임을 질병이라며 매도하고, 성적인 모든 것을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 판단해 회피하고 막으며 외면한다. 이드를 억제하는 것은 필요할지언정 그 자체를 외면해 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이트의 일리론인 성 심리 발전의 내용처럼 사람들의 정신 질환을 유발할 것이다.
본인들의 알량한 기준으로 선과 악을 만들어 외면하고 막는 행동은, 졸린 사람에게서 이불을 빼앗는 것과 같고, 굶주린 자에게서 빵을 빼앗는 것과 같다. 타인의 권리를 빼앗지 않는 본능은 그 자리에 두어야 한다.
내가 집에서 핸드폰을 집어 던지거나 키보드를 내려친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당신에게서는 내 권리를 빼앗을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권리와 권리가 충동할 때에만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핸드폰이 부숴지면 내 손해다. 이 부분에 대해선 에고와 통장 잔고가 폭력성을 해결할 때까지 냅두는 게 좋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서 식욕은 탐욕스럽고 나쁘다며 빵을 빼앗을 거라면, 그 사람과 싸울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