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보다 고소 쌉싸름한 커피를 좋아한다.
드립커피보다 압력추출커피를 더 좋아하는 이유이다.
원두가 분쇄되면서 퍼지는 향을 코로 마시고, 추출되는 커피 크레마를 눈으로 마신다.
캐러멜색 크레마에서 원두 자체의 고소하고 진한 풍미를 느끼며 따뜻하고 촉촉한 기운으로 온몸이 데워진다.
커피는 어느 상황에서든 협조적이며 어울린다.
독서나 글쓰기를 할 때 커피 한잔은 분위기를 더해주며 마치 내가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어느새 빠져서 집중하다 보면 식어버린 커피가 아쉬워진다.
매너톤의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 보다 '커피 한잔 하자'는 말이 마음에 더 와닿는다. 무엇보다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게 커피이기 때문이다. 한창 수다 중에 갈증을 느끼면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일 수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수다가 격렬해질수록 커피의 온도도 쉽게 내려가지 않는 것만 같다.
나는 가끔 동네 언니들을 위해 커피를 내린다. 언니들의 커피 취향을 다 꿰고 있기 때문에 다들 내가 내려주는 커피에 열광한다. 사실 특별한 것은 없다. 유혹하는 빨간색의 브레빌 커피 머신으로 여러 잔의 커피를 내리다 보면 어느새 집안에 커피 향이 가득해지고 홈카페가 시작된다. 내가 마시는 커피를 보고 사약 같다고 놀라워하는 언니들을 우선 안심시켜야 한다. 내 심장은 커피를 마시면서도 머리만 대면 꾸벅꾸벅 졸 수 있을 만큼 카페인에 강하기 때문이다. 취향도, 나이도, 외모도 다른 그녀들을 위해 샷을 빼고 물을 조금 더 붓는다. 예쁜 카페에서 주는 대로 카페인을 삼키며 자신을 위장하지 않아도 되니 속도 마음도 편해진다. 이제 솔직해질 준비가 된 언니들은 취향대로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수다 삼매경에 빠진다.
우리들의 수다는 매일 같은 듯 다른 이야기를 하고, 한 사람만의 이야기인 듯 다같은 마음으로 듣는다. 일각에서는 브런치를 즐기는 주부를 겨냥하며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가지고 여유나 부린다는 쓴소리를 하는데, 표면적으로 드러난 부분만 보고 왜곡된 해석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아줌마 수다를 세상 쓸데없는 것이라고 보는 불편한 시선도 있는데 그것 역시 과장된 드라마나 영화 같은 곳에서나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동네 아줌마는 오전 시간이 가장 자유롭고, 생활비를 아껴보려고 비싼 브런치 카페를 찾는 대신 가성비 좋은 커피 머신이 있는 홈카페를 선택한다. 서로의 집을 방문하며 부담스럽지 않은 소소한 정들을 나누고 생활의 지혜도 나눈다.
아줌마 수다의 실체는 존중과 공감이다. 아무리 마음이 잘 맞는 남편이라 해도, 토끼 같은 자식들이라 해도 공감할 수 없는 엄마들만의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풀고 나면 저마다 비슷한 경험들을 나누고 다들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 위안을 삼는다. 모임을 유지하고자 하는 암묵적인 룰이 지배하는 것처럼 서로에 대해 어떠한 비난도 없다. 그저 듣고 이해하며 존중한다. 혼자 끙끙 댈 때는 짓누르던 묵직한 바위 같은 일들도 수다 한 번에 가벼운 모래가 되어 날아가는 것 같다. 때로는 풍자와 해학을 통해 재미와 웃음으로 넘기기도 한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낼 때 조차 호탕하게 웃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엄마들은 단어 하나에 하나를 더해 꺄르르 웃고, 서로 칭찬하면서 꺄르르 웃고, 같은 쪽을 보고 욕하면서 꺄르르 웃는다. 그렇게 웃고 나면 막혀있던 마음 한편이 비어지고 살아갈 에너지가 채워진다.
오늘도 따뜻한 커피 한잔과 그녀들을 생각하며 또다시 마음이 차오른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 동네언니의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