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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고민하는 당신에게

by 뚜샷뜨아

월요일 아침, 전날 꺼내 두었던 사직서를 기억 저장소인 해마 어딘가에 잠시 넣어 놓고 터덜터덜 무겁게 집을 나선다. 떠오른 해를 보고 시작한 하루가 정신없이 해가 진 줄도 모르고 끝날 때면 깊숙이 넣어 두었던 ‘사. 직’ 글자들이 둥둥 떠올라 마음을 휘젓는다. '이렇게 계속 회사를 다녀도 되는 걸까?' 쉬어빠진 한숨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나도 한창 회사를 다닐 적에는 말 그대로 버텼었다. 그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커리어도 지켜야 하고 돈도 벌어야 했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 영상필름처럼 머릿속을 지나가다가 '현재' 상황과 오버랩이 되었다.


같은 월요일 아침이지만 떠나기 싫어하는 자 뒤에는 남기 싫어하는 자가 있다. 남편과 아이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 주말 내내 비비고 구른 흔적들이 선명하다. 마음속에서부터 오염 공포가 피어오른다. ‘아.. 지저분해. 또 시작이구나.’ 쓰레기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아 집안 곳곳을 누비며 줍고 버리고 쓸고 닦고를 반복한다. 그런데 반나절 동안 청소를 했음에도 티가 나지 않는다. 인정받기 위해 한 행동은 아니지만 아무도 알아줄 리 없으니 맥이 빠지는 느낌이다. 적어도 나의 불안을 달래 주었으니 그걸로 할 일은 다 했다고 체념해 버리고, 또 다른 불안 요소를 찾아다니며 일상의 루틴 속에 빠진다.


남편은 은퇴 후의 삶에 대해 말한다.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면 너와 내가 다정하게 손 잡은 채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취미 활동도 다니는 그런 노부부의 모습을 그리면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학업 뒷바라지를 무사히 끝내고 두 사람이 경제적으로 부담 갖지 않고 일상을 영위해 갈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남편은 이상적인 모습을 꿈꾸고 있지만 당장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지나가고 있는 현재가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남편은 사회에서 정한 퇴직의 나이를 은퇴의 기점으로 두고 있다. 정년을 채우고 싶어 하는 마음과 달리 사직서를 늘 품고 다니는 남편은 은퇴 후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은퇴'라는 단어는 숨고 물러난다는 의미를 가진 한자로 이루어져 있다. 직업이나 직책에서 물러나거나 사회적 활동이나 역할에서 점차 물러나는 것을 가리킨다. 옛날이야 한 직장에서 정년까지 채우는 것이 가능했다지만 요즘 시절이 하 수상하니 어찌 될지 모르는 불안함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은퇴 시점을 선택할 수 있고 은퇴 후의 삶을 꿈꿀 수 있다. 일상에서 허우적대며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은 나의 상황과 달라서 부럽고 샘이 난다.


직장인이 분명한 남편과 달리 전업주부의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는 은퇴라는 단어가 생경하게 다가온다. 남편이 말하는 은퇴 후의 삶 속에는 분명 내가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나도 남편을 따라 은퇴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전업주부에게도 은퇴라는 것이 적용이 가능할까? 나도 은퇴 후의 삶을 꿈꿔볼 수 있을까?

사회적 역할에서 물러나서 육아를 하고 있는 나에게는 '경력 단절 여성'이라는 네이밍이 붙어 있다. 이 네이밍 때문에 나는 피해의식이 생겼고, 돌아갈 수 없는 곳을 향한 미련도 오랫동안 간직했다. 엄연히 따지고 보면 나는 경력 단절이 된 것이 아니라 은퇴를 한 것이다. 단절되었다는 건 자의가 아닌 타의로 끊김을 의미하고, 끊긴 것은 스스로 이어 붙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공무원이나 전문직이 아닌 이상 예전 경력으로 돌아가기 힘든 것이 일반 직장을 다녔던 나와 비슷한 여성들이다. 10년 넘은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가정이라는 테두리 속에 갇혀 사회에서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내 이름으로 신용카드 하나 만들기도 어려울 정도로 사회에서는 거의 소멸 직전이지만 가정은 내가 없으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다. 젊을 적에 세계가 내 무대가 될 것이라는 꿈을 가졌던 나인데, 무대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직장 대신 선택했던 가정은 작고 힘없고 불안한 곳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나에게 전업주부가 될 것을 바랐을 것이고, 나도 그러한 이유에서 경력이 단절된 게 아니라 스스로 은퇴하기로 결심했었던 것이다. ‘은퇴’라는 말로 나의 상황을 단지 좋게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경력단절'이라는 단어 때문에 나도 모르게 생긴 피해의식과 자격지심, 그리고 미련으로 인한 불만과 분노 따위가 세상 살아가는데 가장 쓸데없어 보여서이다. '은퇴'는 한 역할에서 물러나는 것일 뿐 다른 역할로 '복귀' 할 수 있다.

매 순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던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각자의 시간이 늘어났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터널 끝에 빛이 새어 들어온다. 이제 나는 사회로의 복귀 시점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은퇴를 한 번 해본 경험자의 입장에서 죽을 때까지 은퇴가 없는 직업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면 참 좋은 직업 일 거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그리는 은퇴 후의 삶 속에 나도 있으면 좋겠다. 유유자적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 뒤로 강 아래에서 열심히 휘젓고 있는 오리발처럼 발버둥 치고 있을 것이다. 사회로의 당당한 복귀 후에 기품 있고 자신감 넘치고 단단해진 모습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남편이 직장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쉬어가는 날이 온다면 감히 이야기해 주고 싶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해. 삶의 무대를 바꾸기 위한 준비 작업 같은 거지. 사회적 역할은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잖아. 은퇴 후에 인생 2막은 어떤 모습이 되면 좋을지 천천히 고민해 보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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