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케터 S May 13. 2023

이별에 대처하는 그들만의 자세

왕가위 <중경삼림>(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 1994

중경삼림은 사랑에 관한 영화다. 사랑에 관한 영화. 이보다도 추상적인 일곱 글자가 더 있을까. 더 풀어보면, 사랑이 끝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에 앞서 전 연인을 보내고,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는 영화다. 영화에 나오는 두 남자 인물은 모두 연인에게 갖가지의 이유로 차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각자 가진 실연의 아픔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겨낸다. 지무는 통조림의 유통기한을 사랑의 유통기한으로 치환하고, 땀으로 젖을 때까지 조깅한다. 더 흘릴 눈물이 없을 때까지. 양조위는 전 연인이 남긴 열쇠와 편지를 끝내 열지 않은 채 집에 있는 다양한 물건에게 말을 건다. 주로 물에 젖어 있는 물건들이다. "왜 그렇게 울고 있어, 힘내"와 같은 말을 던진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과 비슷하달까. 


두 남자가 이별을 극복하는 과정 중에, 그들에게는 새로운 여자가 등장한다. 지무는 통조림의 유통기한이 끝나는 날, 자신이 있던 바에 처음으로 들어온 여자를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여자는 왠지 무심하다. 그러다 둘은 바의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함께 있다, "쉬자"는 말에 모텔로 가지만 여자는 진짜 쉬기만 한다. 그렇게 지무는 모텔 방을 나오고, 여자는 매일 가던 바에 가서 주인을 총으로 쏜다. 그 후 가발을 벗고 어딘가로 떠난다. 


양조위는 매일 가는 음식점에서 셰프 샐러드만 시킨다. 여자친구한테 줄 것도 아니지만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메뉴만 주문한다. 마치 아직도 잊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러다 사장이 여자친구에 대해 물어보자 떠났다는 대답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다른 사람도 만나고 싶대요. 맞는 말이죠. 야식도 이렇게 선택지가 많은데 사람이야... 셰프 샐러드도 잘 먹어 놓고는 무슨 피시앤칩스로 바꾼다고." 이후 여자친구가 식당에서 양조위를 기다리다 만나지 못하고, 열쇠가 담긴 편지를 남긴다. 


이 영화를 보고 한 가지 물음이 떠올랐다. 이별을 이겨내기 위해 진행했던 행동이 있는가? 중경삼림을 두 번째 보고 느낀 것은 사랑과 이별에 익숙해지기 위해 찾아보기 좋은 교과서와 같은 영화라는 점이다. 특히 두 번째 이야기-양조위와 왕페이-에서 마지막 장면이 그 용기를 내게 한다. "캘리포니아에서 내일 저녁 8시에 보자"는 말에 양조위는 기다리고, 왕페이는 오지 않았다(사실 갔지만 아는 체하지 않은). 그리고 왕페이는 진짜 캘리포니아로 간다. 목적지가 적혀있지 않은 1년 뒤의 항공 티켓만 남겨두고. 왕페이는 1년 뒤 양조위가 있는 식당에 온다. 그리고 양조위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제복 안 입은 모습이 멋있다"는 말을. 


양조위는 왕페이에게 바람맞은 날, 편의점에서 전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그때 여자친구는 "당신은 역시 제복 입은 모습이 멋있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왕페이는 "제복을 안 입은 모습이 멋있다"는 말을 한다. 이 대사에서 보이는 대조는 떠나간 연인과 새로 올 연인을 받아들이는 상징적인 의미라 생각한다. 내 눈에 한없이 멋있게만 보이던 사람이 떠나갈 때는 우리 사이가, 이 모습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던가. 양조위는 그런 의미에서 제복에 더 미련이 없어져 식당을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경삼림을 볼 때, 사랑은 변한다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된다. 사랑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유통기한이 없길 바라는 지무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지무와 양조위 모두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사랑에 대해 이보다 진솔하게 표현한 영화가 있을까 싶다. 언젠가 이별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전 망설이거나 힘든 감정이 든다면 이 영화를 꺼내봐야겠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매년 5월 1일과 여름이 다가올 때마다 이 영화를 꺼내볼 것 같다.


//


아래는 소설을 읽는 듯 뇌리에 남는 지무의 독백을 옮겨 적었다.

헤어진 날은 만우절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고, 이 농담이 한 달만 가길 바랐다. 난 헤어진 날부터 5월 1일이 유통 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매일 샀다. 파인애플은 아미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고 5월 1일은 내 생일이기 때문이다. 통조림을 30개 다 샀을 때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마음의 유통기한도 끝이라고 생각했다. 

4월 30일 월요일.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없나요?"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물건이든 유통기한이 있다. 꽁치도 유통기한이 있고, 미트소스도 유통기한이 있고, 랩조차도 유통기한이 있다. 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유통기한이 없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마침내 한 편의점에서 30번째 통조림을 구했다. 그리고 5월 1일 아침 깨닫게 되었다. 아미에게 난 이 파인애플 통조림과 다를 바 없었다. 


Written by 김수진

매거진의 이전글 화려하고 별난 액션의 향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