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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융 Oct 20. 2017

잠자리와의 동행

당근, 샐러드, 토마토, 감자... 또 뭐가 있더라, 아! 오렌지!


냉장고를 열었더니 식재료가 다 떨어진 게 보였다. 쌀이랑 파스타는 충분히 있었고, 방금 수확한 호박과 허브도 있었지만 이것 가지고 다시 또 일주일을 버티기는 힘들었다. 나는 백팩을 아무렇게나 매고서는 유기농 농장으로 향했다. 


농장으로 향하는 길은 두 군데가 있었다. 하나는 큰길이었는데, 도로가 '그나마' 정리되어 있어서 뱀이나 들개를 만날 확률이 훨씬 낮았다. 하지만 이 길을 택하면 농장까지는 삼십 분을 걸어야 했다. 다른 하나는 좁은 샛길이었는데, 이웃집의 뒷마당을 통해 가는 길이었다. 이 샛길로 가다 보면 개울도 볼 수 있고, 농장까지 가는 시간도 십 분으로 아주 절약됐지만, 또 뱀이 나오기도 하고 들개를 볼 수 있기도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오른손에 나무 막대기를 쥐고서는 샛길로 향했다. 만약 뱀이나 들개가 온다면 나무 막대기로 쫓아버릴 생각이었다. 게다가 내가 샛길을 택한 이유는 경치나 시간의 절약도 있었지만, 나비와 잠자리를 볼 수 있다는 이유가 더 컸다. 샛길을 지나다 보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나비와 잠자리 들이 풀이나 꽃 위에 앉아 있거나 내 옆을 지나가곤 했다. 그중에서는 내가 처음 보는 종류와 문양을 지닌 아이들도 있었다. 


오 분이 걸려 도착한 이웃집의 오라시오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는 뒷마당으로 향했다. 날이 유난히 좋았다. 햇빛도 그렇게 심하게 내리쬐지도 않았고, 바람은 솔솔 불고 있었다. 내가 샛길로 들어서는 순간 어떤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공중으로 붕 날았다. 깜짝 놀란 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내 몸도 얼어붙었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뱀인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대체 보이지가 않았다. 산속에는 종종 독이 든 뱀들도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자칫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얼음이 된 채로 몇 분이 더 흘렀을까. 나는 나무 막대기를 바닥에 조금씩 두들기면서 앞으로 살금살금 전진했다. 뱀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았지만 두려웠던 나는 한참 동안 징검다리를 건너 듯 폴짝폴짝 뛰어서 샛길을 벗어났다. 


가슴이 펄떡펄떡 뛰는 상태로 농장에 도착한 나는 농부에게 포르투갈어로 삐뚤빼뚤 적어 온 종이를 건네고, 곧 야채와 과일들을 건네받았다. 야채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양도 많고 무거워서 내가 준비한 백팩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기에, 봉투를 하나 더 건네받아 들고 가야 했다. 그러고 나니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물론 삼십 분이 걸려서 안전하게 가는 길을 택하면 좋겠지만, 들고 있는 봉투의 무게 때문에 금방이라도 팔이 떨어질 것 같았다. 이것들을 들고 삼십 분을 더 걷는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오는 길에 나비들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지 않는가.


나는 조심스레 다시 샛길로 들어섰다. 불안해서는 괜히 걸음마저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던 나를 멈춘 건, 내 눈 앞을 지나가는 한 마리의 나비였다. 나비를 나를 스쳐 지나가더니 내 뒤의 풀잎에 살포시 날개를 내려놓았다. 새파란 색도 아니고 하늘 색도 아닌, 녹색과 파란색이 오묘하게 섞인 그 나비는 풀잎과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나도 나비를 바라보고 있느라 그 앞에 서서 한참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나비가 바로 옆에 핀 꽃에 앉았다. 새 빨간 나비였는데, 신기하게도 나비의 바깥 날개와 안쪽 날개의 색깔이 조금 달랐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발견했다. 

나비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내가 무슨 이유인지 고개를 돌렸는데, 바로 내 팔 위에 잠자리가 살포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몸통에 파란색과 초록색이 어우러 지고 빨간색의 점들이 조그맣게 박혀있던 그 실잠자리는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종류였다. 그런데 내 시선을 느낀 탓일까, 잠자리가 다시 날아갔다. 아쉬웠다. 나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다시 똑같은 잠자리가 날아오더니 똑같은 장소에 앉았다. 내 팔 위였다.


내가 걷다 보면 잠자리도 다시 날아가리라 생각했지만, 잠자리는 내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매미라도 된 듯 내 팔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잠자리가 내 팔 위에 앉아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걸음걸이는 달라졌다. 잠자리와 나비가 땅 위를 걷는다면 마치 이렇게 걸을 것만 같았다. 사뿐사뿐 하는 걸음걸이뿐이 아니라 신기하게 몸도 가벼워졌다. 아니, 가벼워졌다기보다, 내 손과 등에 들린 무게가 방금 전처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온 정신은 내 팔 위에 앉아 있는 잠자리와의 동행에 있었다. 


샛길을 지나고, 이웃집을 지나, 집 앞의 대문에 와서야 잠자리는 훨훨 날아갔다. 그때서야 나는 뱀이 있던 곳을 사뿐사뿐 걸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자리와의 동행이 나에게 내 팔과 등에 얹힌 무거운 짐과 뱀에 대한 공포마저도 잊게 만들었던 것이다.



 브라질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헤어질 때에 종종 듣는 말이 있다.

 Vai com Deus! 

신과 함께 걸어라! 라는 뜻이다. 이 '신과 함께 걷는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집으로 돌아와 짐들을 내려놓고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알 수 없는 벅참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왔다. 신과 함께 걷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내가 전에 신이라고 생각했던 그것, 오늘 나는 한 사람 속에서 만나네.”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는 그런 말을 했다. 그는 신을 어딘가 높은 곳에 있는 존재나 멀리서만 볼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그의 곁에 살아 있는 인간 존재의 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날, 내 팔 위에 앉은 잠자리의 안에서 어렴풋이 신을 발견했다. 그날, 나는 신과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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