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혼 후 아직도 내가 적응이 되지 않는 날이 있다.
바로 명절이다.
그와 처음 맞았던 설날, 나는 한 쌍의 부부가 되어 부모님께 세배를 했다.
먼저 결혼한 사촌 언니, 동생네와 함께 부부들이 모여 어른들에게 절을 올리고, 용돈을 받던 입장에서 드리는 입장이 되어 아, 이제 나도 한 가정을 이룬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뿌듯함과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더랬다. 조카들은 한복을 입고 어설픈 절을 하며 바닥에 콩 하고 머리를 찧었고, 어른들은 내게 너도 곧 아기 봐야지 하며 기대에 찬 덕담으로 함께 웃던 날이 있었다.
헤어진 지 몇 달이 흘러 좀 나아졌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때, 설날이 돌아왔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아빠 차에 올랐다. 이혼 후 가족모임이나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은 어쩐지 껄끄러웠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라 피하기도 뭐했다.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는 조카들이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거하게 차려진 명절 상, 푸짐하게 퍼올린 떡국과 솜씨 좋은 큰이모가 늘 맛깔나게 해 주시는 먹음직스러운 갈비, 엄마가 하신 잡채, 함께 만든 반찬들이 놓여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푸짐한 밥상. 우리는 떠들썩하게 식사를 하고 나서 상을 치웠다. 이제 세배를 할 차례였다. 자연스럽게 전처럼 부부끼리 먼저 서본다. 사촌네 부부들이 나란히 섰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들이 먼저 세배를 하고 나니 미혼인 남동생들과 내가 남았다. 세배를 하려고 동생들과 섰는데 다시 혼자가 되어 서있는 내 모양새가 참 초라하고 우습기도 해 순간 민망해졌다.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내색할 수 없어서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동생들과 세배를 하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아마 말은 안 했지만 우리 가족들도 씁쓸했으리라.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절을 했지만 속마음은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배를 마친 뒤 가족별로 나눠 윷놀이 판이 벌어졌다. 부부는 부부끼리, 나는 우리 가족들과 한 팀으로 윷놀이를 했다. 놀이는 재밌었고 유쾌했지만 내 손에 들려있는 윷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아닌 척 겨우 웃으면서 윷을 날렸다. 힘없이 떨어지는 하나의 윷가락이 하필 깔아 둔 담요 밖으로 나뒹군다. 낙이구나. 아쉬움의 한숨이 나온다. 동그러니 떨어져 혼자 나뒹구는 한 개의 윷가락이 나처럼 초라했다. 그날 윷판은 우리 가족의 패배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눈물이 나려는 것을 계속 삼켰다. 떠들썩한 가족모임 속에서 예전에 결혼 후 맞았던 첫 명절이 생각나서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이들까지 함께 데려온 사촌 부부들을 보고 있노라니 더욱 그랬다. 단란한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게 힘들어 SNS도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혼 후의 일상은 때때로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엄마와 함께 가지던 커피 타임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낄 때면 예전엔 몰랐던 일상이 소소한 행복이 되어 돌아오고, 자유롭게 아무 걱정 없이 나 자신에 충실한 하루를 보낼 때면 힘들었지만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느 날 만난 친구가 결혼이나 임신 소식을 전해올 때, 명절에 가족을 이룬 사촌네를 만날 때, 엄마 친구분들의 자녀들 소식과 우리 친척들 사이에서 다시 혼자가 된 날 보고 마음 쓰여하실 부모님을 생각할 때면 다시 슬픈 기분이 찾아들기도 한다.
어제 있었던 조카의 돌잔치를 치르며 행복한 사촌네의 모습에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가? 이혼 전의 나, 결혼 전의 나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내 결론은 '아니, 돌아가고 싶지 않다.'였다.
외로운 밤도 있고 슬픈 밤도 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날도 있었고 웃을 수 있는 날들도 있었다.
이따금씩 슬픔은 잊지 않고 찾아오지만 이전보다 되찾은 나 자신, 내 삶이 더 소중해졌기에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기쁨과 행복들도 많아졌다. 생각은 깊어졌고 경험은 모여 나를 더욱 성숙하게 한다. 이혼으로 인해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다. 전혀 새로운 일들이 생겨났고 스스로도 내면이 변화한 것을 느낀다. 지나온 시간들이 모여 일주일이, 한 달이, 일 년이 된다.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것이 인생의 한 페이지씩으로 남아서 내 인생이 되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지난 설날, 나는 가족 모임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은 섭섭하시겠지만 내가 가서 나도 가족들도 전처럼 속상한 기분을 느끼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나는 설 일정에 맞춰 제주도행 비행 편을 끊었다. 혼자 가면 뭐가 좋냐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씩 웃으며 짐을 꾸리고 아이패드를 챙겼다.
혼자 제주공항에 도착해 렌터카를 찾는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여유롭게 짐을 풀고 나와 밥을 먹고, 예쁜 카페에 가서 아이패드를 펴고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바람이 분다. 제주의 낮은 건물들과 생경한 돌담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이채로워 마냥 바라보았다. 여행객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편안함에 젖어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아차 하는 사이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자판을 두드렸다. 아까 비행기에서 떠올린 어떤 이야기를 적어볼 참이다. 어쩌면 내가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한동안 열심히 글을 쓴 뒤 브런치에 들어갔다. 아직 작가 신청도 하지 않은 내 브런치 작가의 서랍을 열어 그곳에 오늘 쓴 글을 넣어둔다. 두세 편이 모이면 내 이야기로 작가 신청을 해봐야지. 그렇게 써나간 인생의 한 페이지는 오늘 이렇게 모여 많은 글로 남았다. 아마 내일도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질 것이다.
살아온 모든 순간은 그 시간을 살아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순탄하건, 순탄하지 않았건 간에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으므로.
그렇기에 나는, 내 인생을 써나가는 것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