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박 Dec 22. 2021

<지옥>, 당신의 슬픔을 설명하지 마세요

아무도 몰라도 되는 당신만이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람은 두려운 것에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전공 시간에 배웠던 건데요, 죽었으나 걸어 다니면서 사람을 물어뜯는 존재에는 '좀비',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공감능력이 심하게 결여된 사람은 '사이코패스' 등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규정화할 수 있어 덜 무서워진다고요. 이 수업을 들을 때 제가 무서워했던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기, 언제 짖을지도 모르겠고 왜 짖는지도 모르겠는 강아지 그리고 좀비물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무서워해요.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에게 왜 고지가 내려왔나요?

정진수는 20년 후 지옥에 간다는 '고지'를 받고 '새진리회'를 만듭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시연'이 일어났고, 박정자의 시연이 생중계를 타면서 새진리회는 부흥의 급물살을 타게 되는데요. 박정자에게 왜 고지가 내려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들 예측을 할 뿐이죠. 그렇다면 정진수에게는 왜 고지가 내려왔을까요? 정진수 말로는 자신은 연필 한 자루 훔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모를 일이죠. 죄를 짓는 건 생각보다 쉬우니까요. 어쩌면 진경훈 형사의 딸 희정을 살인에 이용하는 것이 예고된 일이어서, 정진수의 신이 그를 지옥으로 데려가기로 한 걸지도 모르죠. 정진수는 20년 후 미성년자를 살인에 끌어들이고, 시연을 받을 것이다...라는 식으로요.

고지가 내려지는 기준, 고지를 내리는 존재나 시연을 하러 달려오는 세 덩어리의 정체를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옥>은 그것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그것들이 무엇이냐' 보다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가 더 중요해 보이네요.



아주 좁고 개인적인 재난

사실 저도  고지가 내려오고, 굳이 시연을 하는 방법으로 무차별적 폭력  화형을 택했는지 같은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무릎 꿇고 아빠의 죄를 대신 고백하는 어린아이,  아이의 아빠가 다른 것을 말했던 박정자, 20  고지를 받아 무한한 공포심에 휩싸였던 정진수를 보고 있으니 우리는 너무나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가정환경은 어땠는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예정이래? 같은 것들이요.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난들은 아주 넓은 형태로 발생하여 다수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고지는 아주 좁게 발생하여 한 명의 사람을 죽입니다. 어쩐지 고지가 저에게 예고도 없이 닥쳐온 슬픔이나 개인적인 재앙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저는 왜 그런 일이 생겨났는지 설명을 해야만 할 것 같아요.



당신에게 왜 그런 슬픔이 찾아왔나요?

인생을 길게 살진 않았지만, 잠 못 이룰 만큼 슬픈 적은 분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왜 이렇게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지 설명하곤 했어요. 어린 시절에는 동사무소에 가서 우리 집에 대해 설명할 일이 많았어요. 동사무소 어른들을 설득해야만 했죠.

다른 사람들에게서 슬픈 티가 나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봐주었어요. 같이 울기도 하고, 진심을 다해 위로해주기도 했지만 대신 고지를 받아줄 수 없는 것처럼 그 사람 몫의 슬픔은 항상 그 사람에게 남아있었어요.

저는 저에게 갑자기 일어난 슬픔을 죄처럼 느낄 때가 있어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고민하기도 하고요. 왜 우리 엄마에게, 왜 내 친구에게 그런 슬픈 일들이 일어날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고, 저는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두려워요.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일들에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도.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구나 혼자 짊어지고 있는 슬픔이 있습니다. 왜 슬픈지 모르지만 슬플 때도 있고요. 고지라는 것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재난이라면, 슬픔 역시 그렇습니다. <지옥>에서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지만, 저는 저의 슬픔을 고백하지 않고 싶어요. 혼자서 애쓰고,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슬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롭고 쓸쓸하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일들도 있어요.

소현, 영재 부부의 갓난아기에게 고지가 내려옵니다. 아기는 죄를 고백할 길이 없고, 부부는 아기를 감싸 안고 대신 죽습니다. 고지는 대신 받아줄 수 없지만, 시연은 대신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아기를 그렇게 둘 수 없다는 부모의 마음이 조금은 통한 걸까요.

살아남은 갓난아기를 보고 나니 슬픔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는 조금 알 것 같았어요. 아무래도 우리는 계속 슬플 것이고, 나이가 들수록 더 깊고 무거운 슬픔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혼자 감당하다가 쓰러지는 날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나아가게 되겠죠. 갓난아기를 들고 도망가는 민혜진처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를 붙들고 달릴 수밖에 없을 거예요. 고지의 끝은 시연이지만, 슬픔의 끝은 무엇인지 아직 모르니까요.

언젠간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고요.





매거진의 이전글 깊게 파인 마음속에 이야기가 고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