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 꼭 놔드릴게요
MZ세대는 싸가지가 없다는 편견이 있다.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거나,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욕한다. 미디어에서 MZ세대를 타겟으로 삼은 개그 프로를 보아도 남 눈치를 보지 않는 무례한 점을 포인트로 삼는다.
하지만 ‘싸가지 없고 무례한’ 젊은이는 극소수의 사례가 부풀려진 것이다. 편견이란 것이 대부분 그렇듯, 예외적이고 특수한 케이스가 마치 전체의 특징인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막말로 ‘요즘 젊은 놈들은 예의가 없다’는 말은 기원전 고대 문명 사람들도 즐겨 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예의 없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
한국 젊은이들은 예의가 바른 편이다. 길거리에 걸어다닐 때 소매치기 걱정을 하지 않고, 카페에 자신의 짐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화장실에 갈 수 있는 나라는 흔치 않다. 한국 시민들의 시민의식이나 예의범절은 세계 최상위권이라 할 수 있겠다.
도리어 내 눈에는 MZ세대가 과하게 예의 바르다는 인상을 받을 때도 있다. 어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거나, 부모와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 모습을 보면 특히나 그렇다.
우리는 겉으로는 개인주의자인 척하지만 실상은 유교의 노예다. ‘유교보이’, ‘유교걸’이란 단어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대한민국은 유교 국가다. 그 옛날 조선시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한국인의 뿌리와도 같은 정신이다. 웃어른에게 인사하기나 부모님께 감사하며 평생 효도하기 따위같이 우리가 배운 대부분의 예의범절은 이 유교에 근간을 두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부모를 모시기 위해 자식을 죽이는 설화도 자랑스럽게 가르쳐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를 베풀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
정말이지 우리 부모님들은 너무나도 유교에 충실했다.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식을 위해 부모가 희생하는 게 당연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간이고 쓸개고 모두 내어주는 게 그것이 부모 된 도리였다.
자식의 성공을 위해 직장에 나가 돈을 벌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을 하며 회사에 살다시피 했다. 새벽부터 공장에 나가 밤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도 노동은 끝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밀린 집안일도 해치워야 했다.
가정을 위해 일만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사라졌다. 젊은 시절 가졌던 꿈, 하고 싶었던 일을 모두 포기하고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라는 정체성만 남았다. 이름으로 불리기보다 ‘ㅇㅇ아빠’, ‘ㅇㅇ엄마’로 불리는 게 익숙해졌다. 바쁘게 살다 어느 날 뒤돌아보니 내가 남긴 것은 없었다. 내게 떠맡겨진 책임과 의무에 인생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럼에도 아이를 보며 버텼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어린 자식을 생각하며 고된 일도 견딜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들은 그렇게 우리를 키웠다. 우리의 성공만을 기원하며, 당신의 모든 인생을 바쳤다.
커뮤니티에 심심찮게 ‘효도를 어디까지 해야 하냐’는 질문이 올라온다. 이게 무슨 생뚱맞은 질문인가 할 수 있다. 효도를 어디까지 해야 하냐니. 본인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 해야 할 것 아닌가? 부모님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용돈도 주고, 안마의자도 마련하고, 효도 여행도 데려다줘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이 ‘효도’ 때문에 고민한다. 사실상 한국의 효도는 물질적인 것으로 환산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자식을 키우는 데 무지막지한 양육비와 교육비가 필요한 한국이다. 자식의 효도는 부모를 위한 경제적 보상이 될 수밖에 없다. 효도의 상징이라 불리는 명문대 입학, 대기업 취직, 전문직, 돈봉투, 안마의자 등등. 모두 다 그렇다.
문제는 ‘효도’를 하기 위해 필요한 돈이 부담스럽다는 점이다. 부모에게 돈 쓰는 게 아깝다는 뜻이 아니다. 나 혼자 살기도 힘든 세상이다. 나 혼자 살아가는 데도 돈이 쪼들린다.
한 달에 100만 원씩 용돈을 드리고, 효도 여행을 보내드리고, 안마의자를 사주고. SNS나 티비를 보면 심심찮게 이런저런 효도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저런 짓들은 웬만큼 성공한 게 아닌 이상 힘들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효도의 상징으로 불리는 게 실상이다.
현대 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보다는 당장의 생존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커뮤니티에 ‘어디까지 효도해야 하냐’는 질문을 올린다. 어느 정도 해야 불효자라 눈치 볼 일 없을지, 효도와 생존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돈봉투에 이것밖에 넣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패배감을 느낀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기대를 주셨다. 나의 인생이 곧 당신의 인생이었다. 당신이 꿈과 희망을 포기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 꿈과 희망이 곧 나였다는 사실을 이젠 알기에.
하지만 부모님이 내게 주셨던 희생과 헌신, 기대감은 내가 감히 감당할 수 없이 거대했다. 우리는 그 기대감을 충족시키고 보상해줘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다. 그것이 마땅한 자식 된 도리이자, 효도라고 여겼다.
우리의 능력은 당신의 기대와 달리 보잘것없었다. 아무리 학원에 다녀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고, 명문대는커녕 인서울에 합격이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부끄러운 합격증을 가져가니 당신은 애써 웃어 보였다.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자랑스럽다고.
대학에 합격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취업난, 끝없이 올라가는 집값. 부모님의 헌신과 기대에 보답하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 당신이 내게 주었던 사랑은 어느새 기한이 훌쩍 지난 부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부모님의 기대만큼 성공하지도 못했고, 행복하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다. 부모의 기대를 배신하고 말았다. 나도 부모님이 친구에게, 친척에게 당당하게 자랑하실 수 있는 그런 자식이 되고 싶었는데. 그래서 마음 한 켠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202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 부양의 책임이 자식에게 있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21.4%였다. 젊은 세대도, 기성세대도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식은 혼자 살아가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부모는 자식의 발목을 붙잡는 짐덩이가 되고 싶지 않아 한다.
무한 경쟁 사회는 결국 생존을 위해 효도조차 포기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직도 퇴직하지 못하신 부모님을 보며 갈 길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부모님, 불효자는 웁니다. 나중에 성공하면 보일러 꼭 놔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