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잖아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말에 동의하는 MZ는 없을 것이다. 이제 한 나무를 열 번씩이나 찍는 사람은 범죄자 취급받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집 앞까지 쫓아가는 걸 한때는 낭만이라 여겼지만, 이제는 스토킹 범죄밖에 되지 않는다. 용기 있는 자만이 사랑을 쟁취한다지만, ‘고백 공격’은 제발 좀 참아줬으면.
한국의 20대 모태솔로 비율이 30%를 넘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허우대 멀쩡한 젊은이라면 애인이 있는 게 당연했는데, 결혼 시기가 점점 미뤄지더니 이제는 연애도 미루는 세상이 되었다. 나 빼고 다 연애한다고 한탄하지만, 사실 연애하는 사람이 훨씬 드문 현실이다.
젊은이들이 연애를 안 한다. 이 사실에 부모님 세대는 놀라곤 한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한 번뿐인 청춘을 왜 낭비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집 안에 틀어박혀 넷플릭스만 보는 우리를 보며 효도나 애국할 생각이 없다고 답답해한다.
내가 학생일 때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학생이 무슨 연애냐, 공부나 해라’라는 의견과 ‘어른은 학생들의 이성 교제를 권장해야 한다’라는 의견이 혼재되어 있던 때였다. 그 혼란을 직격으로 맞은 게 바로 내 세대다. 분명 초등학생 때는 여자애 손 하나 잡는 것조차 어른에게 혼났는데, 중학생이 되자마자 선생님들이 태도를 돌변하고 우리의 연애를 적극 권장했다.
외향적인 친구들은 금세 애인을 만들었다. 교실에서 설레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더니, 어느 틈에 학교 곳곳에 깨를 뿌리면서 다니기 일쑤였다. 수업 시간, 쉬는 시간 가리지 않고 한 의자에 부대껴 껴안아 앉아 있고, 선생님도 그들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나처럼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애들에게는 딴 세상 얘기였다. 여친? 쉬는 시간에 여자애 놀리고 전력을 다해 도망가는 애들한테 그 따위 관심 없었다.
어른들은 사춘기 때 이성에 눈을 뜨고 성욕이 폭발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애들도 많다. 내 경험상 딱 절반으로 나뉜다. 절반은 자기들끼리 모여 이성 친구 중에 누가 외모가 뛰어난지 열심히 토론하고, 나머지 절반은 게임 얘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특이한 놀림이 있었다. 남자애와 여자애가 서로 붙어 다니기라도 하면 반 친구들이 그 둘이 좋아한다, 사귄다 하며 놀렸다. 어쩌다 같은 모둠이 된 것뿐인데, 우연히 수행평가를 같이 하게 된 것뿐인데 둘이 오순도순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이라도 되면 온갖 소란을 피우며 너네 둘이 사귀냐고 소리쳤다. 그러면 그 당사자들은 아무 사이가 아닌데도 어색한 사이가 되어 멀어지기도 했다. 한 여자애는 수업 시간에 울기까지 했다. 서럽고 애처롭게, 수치심에 사무쳐서 펑펑 울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선생님은 근엄한 목소리로 그렇게 놀리지 말라고 훈계했다. 지도 방금 전까지 신나게 놀려댔으면서 말이다.
대체 MZ세대는 연애를 왜 안 할까? 단체로 성욕이 사라진 걸까? 글쎄, 그렇다고 하기엔 우후죽순 쏟아지는 연프를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남의 연애엔 과몰입해가며 열광하면서, 왜 정작 지는 연애를 안 하는 거야?
여기에는 큰 오해가 있다. MZ는 연애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사랑하고 싶어도, 그럴 능력도 여유도 없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알파메일, 알파피메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력적인 외모와 탄탄한 몸매, 세련된 패션을 전시해놓은 그들의 게시물에는 온갖 댓글이 달린다. 그들은 자랑하듯이 남친/여친과의 사진도 올린다. 그들과 비교하면 거울 속 내 모습은 노량진 수산시장을 방불케 한다.
외모만 문제가 아니다. 외모, 몸매, 운동, 직업, 돈, 취미 등등. 연애를 하기 위한 조건이 너무나도 많다. 미디어와 SNS 때문에 다들 눈이 너무 높아졌다. 이제 저 조건 중 하나라도 맘에 안 들면 연애 시장에서 도태된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연애하기엔, 이젠 우리가 신경 쓸 것이 너무나도 많다. 학업, 스펙, 자격증, 취업, 저축…. 이성에 눈을 돌리기에 내게 닥친 현실이 매섭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봉인한다. 연애는 그들만의 세상이라 치부하면서. 연애하기 위한 여유가 생기기 전까지, 자격을 얻기 전까지 연애를 포기한다.
MZ세대는 연애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어떤 유튜버가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라고 한 말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명언이 된 것이 그 방증이다. MZ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가까워지기보다, 좋아하는 마음 자체를 접어버린다. 사랑하며 상처받고 고통받을 바에, 마음을 닫고 구석에 숨어 상처 입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가끔은 부모님 세대가 부럽기도 하다. 돈 한 푼 없는 젊은 시절에 만나, 서로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사귀며, 공원을 걷기만 해도 설레어하던 그 순수하던 낭만을. 그렇게 초라하게 만난 두 남녀가 서로의 미래를 약조하여 자식을 낳았던 그 아름다운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