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제가 되어버린 MZ세대의 인간관계
한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왔다. 자신의 결혼식에 직장 동료가 가족을 모두 데리고 와서는 축의금을 8만 원밖에 내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비싼 호텔에서 올리는 식은 식대만 8만 원인데, 더 내야 하지 않냐고 했다. 이에 댓글 반응은 반으로 갈렸다. 식대를 고려해서 축의금을 더 내야 한다는 사람과, 자기가 비싼 곳에서 식 올리고 자기가 초대했으면서 손익을 따지는 게 옳지 않다는 사람. 이른 바 ‘축의금 논란’은 SNS로 퍼졌다.
축의금 논란은 뜨거웠다. 여러 인플루언서, 유튜버, 연예인이 이 논쟁에 참여했다. 심지어 공중파 뉴스도 축의금 논란을 다뤘다. 누군가는 물가가 올랐으니 축의금도 더 많이 내야 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허례허식에 가까운 결혼식 문화가 문제라고 했다. 둘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나는 이 논란을 바라보며 쓸쓸함을 느꼈다. 개인의 행복에 축하를 건네주는 결혼식이, 손익을 계산하고 염치를 따지고 나와 상대의 관계를 검증하는 시험으로 바뀐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이 내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인간인가 가늠하고, 그조차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해 인터넷에 ‘축의금을 얼마 내야 적당하냐’고 묻는 사람들의 모습에 과연 우리 세대에게 ‘인간관계’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고민하게 되었다.
흔히 MZ세대를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혹은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게 익숙한 세대라는 뜻이다.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유치원에 가 또래 친구들을 만나기 전부터 핸드폰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익힌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친구와 얼굴을 대면하고 대화하는 것보다 인스타 DM으로 채팅을 나누는 게 더 익숙하다.
스마트 기계는 사람들의 소통 방법과 인간관계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말보다는 글자가 편했다. 친구를 새로 사귈 때에도, 취미를 공유할 때에도, 심지어는 고백을 하고 이별을 고하는 것까지 채팅으로 했다. 어른들은 이런 우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평생을 아날로그 세대로 살아온 그들은 스마트폰은 단지 컴퓨터나 핸드폰처럼 생활을 더 편리하게 해주는 발명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은 일상이고, 당연한 것이었다.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 사이에 거대한 벽이 있다. 내 세대는 그 벽을 더욱 잘 느낄 것이다. 90년대 후반~00년대 초에 태어난 세대는 아날로그 세대에서 디지털 세대로 전환된 케이스다.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동시에 겪어봤다. 친구에게 할 말이 있으면 친구 집에 찾아가야 했던 것이, 스마트폰 하나 생겼다고 어디에 있든 바로 폰 꺼내서 카톡 하나만 남기면 해결되었으니.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한국에 본격적으로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피처폰으로 리듬세상이나 놈, 슈퍼액션히어로를 즐기던 아이들이 어느새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쿠키런과 팔라독을 하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스마트폰을 갖게 되며 함께 대세가 된 앱이 하나 있다. 바로 ‘카카오톡’이다. 지금은 중장년층이나 회사용으로만 사용하는 앱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전국민이 사용하는 메세지앱이었다. 전화와 문자로 연락하며, 알이 다 떨어질까 불안에 떨던 때가 엊그제인데, 카카오톡이 나오니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다면 무제한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카카오톡이 자리 잡고 아이들 사이에 은은히 비교하기 시작한 것이 있다. 바로 ‘카톡 친구가 몇 명이나 있나’하는 것이었다. 카톡 친구가 곧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처럼, 서로서로 친구가 몇 명이냐, 이 새끼 찐따네 하며 비교하고 경쟁했다. 우리의 인간관계는 카톡 친구 숫자로 시작된 것이다.
MZ세대의 인간관계는 인스턴트화되었다. 자기가 원할 때 취하고, 원하지 않을 때는 손쉽게 ‘손절’해버린다. 오해가 쌓인 친구와 직접 만나 대화를 하기 보다는, 상대방을 차단하고 영영 모른 척한다. 우리는 상처받기 보다는 차단하기를 선택한다.
넷플릭스 같은 구독형 서비스가 많아진 탓일까, 덩달아 인간관계도 구독형으로 바뀌었다. 인간관계도 구독과 해지가 자유롭길 원한다. 평생 함께하는 친구보다는, 이 학교에 다닐 동안만, 이번 과제를 하는 동안만, 이 회사에 다니는 동안만, 이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만 친하게 지내는 목적지향적 관계가 편하다.
우리는 감정 소모를 극도로 꺼린다. 얼굴을 마주보고 날선 감정이 부딪히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상황을 피한다. 대화를 나누며 갈등을 해결하고 오해를 푸는 과정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사이가 개선되기 보다는 차라리 상대를 차단하고 회피해버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텍스트 메시지로 이별을 고하는 까닭이 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관계에서도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했다. 내 돈과 시간은 소중하다. 심지어 내 감정조차도 한정적인 자원이다. 그것을 가치 있는 사람에게만 투자하기로 했다. 징징거리는 친구, 자기 자랑만 하는 친구, 나를 감정 쓰레기통 취급하는 친구에게 더 이상 관계를 이어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한 관계는 가성비가 좋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손절한다.
인간관계를 ‘정’이나 ‘의리’, 함께해온 시간 따위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투입 대비 산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축의금 논란이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도 이것 때문 아닐까 싶다. 이 사람과의 관계가 소중하다면 축의금이 적든 많든 무엇이 문제가 될까. 관계에서 가성비를 따지니 축의금의 액수도 중요해진 것이다.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좋아요를 받기 위해 발악하지만 정작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만 허락한다. 상처 없는 관계를 구독한 대가로, 우리는 언제든 손절 가능한 일회용 관계가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안전해졌지만, 어쩐지 외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