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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Apr 27. 2021

넌 감정이 없는 로봇 같아

감정이 없는 사람

고등학교 1학년 때 진로 시간에 MBTI 검사를 했다. 인터넷에서 무료로 할 수 있는 수상한 검사가 아닌, 선생님이 전문 기관에서 구입한 검사지를 이용한 나름 전문적인 검사였다. 100개가 넘는 질문에 나는 찬찬히 생각하면서 진지하게 검사에 응했다.


검사를 모두 다한 뒤, 검사지에 겹쳐져 있던 종이를 떼어내 점수를 매겼다. 나는 INTP였다. 설명을 읽자니 얼추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아니 둘 있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내 결과지를 흘낏 보더니 말했다.


“야, 너 E랑 F가 왜 그래?”


내 외향형 점수는 1점, 감정형 점수는 0점이었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IT였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고 웃겨가지고 친구들에게 검사 결과를 자랑했다(?). 봐봐, 나 외향성 1점에 감정형은 0점이야. 친구들이 한참 웃더니 말했다. “이야, 이 검사 진짜 정확하다.”


그 뒤로 일어난 일은 뻔하다.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알파고’. 공부 잘하고 무뚝뚝하고 MBTI도 이러니 그때 당시 한창 유행하던 인공지능 이름이 내 별명이 되었다. 별로 안 친하지만 성격이 활달한 여자애들까지 나를 내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불렀다.


그전까지 별명이라고는 모욕적인 별명밖에 없던 나로서는 이 별명이 맘에 들었다. 그치, 돼지보다는 알파고가 낫지. 적어도 이건 내 장점을 가지고 만든 별명이니까. 똑똑하다는 의미잖아? 어린 시절 별명은 대부분 단점을 가지고 짓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알파고는 똑똑하다는 뜻이라도 있으니.


그런데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별명의 용도가 변해갔다. ‘똑똑하다’라는 의미는 퇴색되고, ‘로봇 같다’라는 의미가 강해졌다. 예를 들면 이렇다.


“(무언가에 공감하지 못하고 반박 중) 아니 도대체 왜 저런 멍청한 짓을 하는 거야?”


“(나를 신기해하면서) 역시 알파고, 인간의 감정을 이해 못하는 것 좀 봐.”


친구들은 나의 알파고스러운 모습에 진심으로 경탄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어떻게 감정이 이렇게나 없을 수 있냐며, 진짜 인공지능 아니냐며 놀라워했다. 나랑 안 친한 여자애들 몇몇은 나를 꺼려했다. 나는 그 애들한테 딱히 무언가를 한 기억이 없는데도 말이다.




감정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남들한테 내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가면처럼 얼굴에 덧대어 살아간다. 동시에 감정을 삭히며 어렵게 소화시킨다. 그런 감정들은 대부분은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소화불량을 일으킨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나는 실제로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 공감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잘 모른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심정에 변화가 잘 생기지 않는다. 친구들이 내게 내린 평가는 어느 정도 정확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인간보다는 로봇에 가까운 인간이었기에. 내게 감정이 존재하는지 감히 확신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처음부터 감정을 잘 못 느꼈던 건 아니다. 여느 아이처럼 나 또한 철없고 장난기 많은 남자애였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이 되고, 본격적으로 죽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매일 밤마다 울었다. 감정을 통제하는 기능이 상실된 것 같았다. 고통스럽고 힘들고 외로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이 마구잡이로 불어났다. 침대에 누워도 눈물을 흘리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베개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을 것 같았다.


어린 나는 혼자서 고통의 원인을 찾았다. 범인은 감정이었다. 내가 힘들고 괴로운 이유가 감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라고. 감정이란 걸 몰랐다면 이렇게 괴롭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내 감정을 증오하고, 억제하기 시작했다. 고통이나 외로움이나 슬픔이나 괴로움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는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최면했다. 남에게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 이는 감정을 모두 검열했다. 혼자서 모든 감정의 폭발을 내면으로 삼켰다.


감정을 없앤다고 인간의 고통이 사라질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위험하다. 처음에는 문제를 맞닥뜨려도 감정의 변화가 없으니 더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다. 스트레스를 감정의 형태로 분출해야 하는데, 감정이 막혀 있으니 스트레스가 속에 쌓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모든 게 점점 위태로워진다. 세상에는 경험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우울증 환자의 우울


사람들이 우울증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은 '우울증'이라는 병명에서 온다. 우울증이라고 하면 단순하게 우울함을 느끼는 질병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울감은 감정이기 때문에 누구나 느낀다. 사람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우울해진다. 기분이 가라앉고, 그 무엇도 하기 싫고, 그저 침대 속에만 가만히 누워 있고 싶다. 누구나 한 번쯤은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울증을 쉽게 오해한다.


경험을 통해 알아낸 사실로, 우울증의 우울감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지속성'이다. 한 번 찾아온 우울감은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의사들이 흔히 권하는 방법들-운동, 햇빛 쬐기, 외출하기, 사람 만나기, 샤워하기, 청소하기 등등-을 해봐도 우울감은 그대로다. 오히려 이런 짓거리까지 했는데도 나아지는 게 없다는 사실에 더 우울해질 때도 있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들은 기본적으로 항상 기분이 다운되어 있다. 기분의 기본값이 일반인보다 낮은 수준에 있다.


두 번째 특징이 가장 골 때리고, 일반인들이 이해 못하고, 나도 이해 안 되는 특징이다. 이유가 없다. 아니, 정말로 우울함의 이유가 없다. 의사 선생님은 어릴 적 겪은 나쁜 경험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나, 입시로 인한 압박감 등등 때문에 내가 우울감을 느낀다고 하신다. 하지만 '내가 우울한 이유가 저것들 때문인가?' 스스로 질문해보면 답은 늘 '아니요'다. 친구들이랑 맘스터치 가서 놀고먹는데 저런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새가 없다. 그러니 겉표정은 웃으면서 속은 우울하다 느끼는 건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왜 우울하냐고 물으면 나도 모르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울감에 대해서만 얘기했지만, 사실 우울증을 겪으면서 우울감보다 더 많이 느낀 감정은 따로 있다. 바로 공허감이다. 마음이 텅 빈 느낌. 그 무엇으로도 마음을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친구들과 웃고 떠들어도, 게임을 해도, 유튜브를 봐도, 끝나고 나면 감당하기 버거운 허무함이 찾아왔다. 그 공허함에 중독되어 몸에 힘이 쭉 빠진다. 무기력함에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새벽 네다섯 시까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 이 시간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대부분은 아무 의미 없는 인터넷이나 유튜브 영상으로 시간을 죽인다.




우울증 환자는 종종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증상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도 증상이 약한 탓인지 나는 그런 적이 없다. 감정은 표출하는 것보다 숨기는 게 쉬웠으니. 그냥 나 혼자 억누르는 게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그래서 난 아직도 내 감정을 속에 쌓기만 하는 중이다. 블럭이 송송 빠진 위태로운 젠가처럼, 쓰러질 듯 말 듯하며 위태위태하게, 조심스럽게 쌓아가고 있다. 조금씩 균형을 맞추면서, 빈자리를 하나하나씩 채워가면서 견고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감정을 거세해버리고 싶던 어린 날도 있었다. 지금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인지하려고 한다. 비록 대부분이 부정적인 감정이더라도, 분명 괜찮은 감정도 느낀 순간도 있으니. 내 감정을 받아들이자. 결국 그것조차 나의 일부분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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