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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Apr 06. 2021

자살이 왜 "나쁜 생각" 인가요

스스로 죽고 싶은 마음에 관하여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나를 지탱해줄 무언가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든 내가 처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학원을 그만 다니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하는 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는데,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평생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아, 죽어야겠다. 죽으면 되겠구나. 죽음 말고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어. 정말 비논리적인 결론이다.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죽어서 도망치려고 하다니. 하지만 열다섯에 불과한 나로서는 그게 최선의 결론이었다. 죽으면 모든 게 말끔히 해결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고,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잠을 설치는 짓도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스스로 죽는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평범한 학생이 자살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칼로 손목 긋기, 높은 데서 떨어지기, 도로에 뛰어들기. 아무리 찾아봐도 죄다 아픈 것밖에 없었다. 사는 건 괴롭지만 죽는 건 무서웠다. '살기 싫다' '죽고 싶다' '죽기 무섭다' '도저히 못 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술래잡기했다. 자살은 정말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였다. 사실 용기보다는 압력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나를 벼랑 끝에 내몰았던 압력은 절벽 아래로 발을 내딛게 하기에는 살짝 부족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계속 살아지는 상황. 시간이 지날수록 죽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이 점차 살이 불어나고 덩치가 커지더니 유혹으로 변해갔다. 어느 순간 나는 인터넷에 '편안하게 죽는 법' 따위를 검색하고, 머릿속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칼로 손목을 긋고 욕조에 들어가면 덜 아프지 않을까. 이 창문으로 뛰어내린다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자꾸만, 자꾸만 이 따위 생각들이 튀어나와 나를 홀렸다.


 나 스스로가 무서워졌다. 이러다가 정말 내가 나를 죽일 것만 같아서. 나 자신이 나를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살인마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갑자기 돌변해서 칼로 내 손목을 그어버릴 것 같았다. 내 주변에 있는 날붙이가 언제 날 위한 흉기로 둔갑할지 불안했다. 방안에 있던 커터칼을 모두 거실로 치웠다. 필통 속에 항상 들고 다니던 가위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로부터 7년이 흘렀다. 나는 지금 살아 있다. 다행히도 자살 시도는커녕 자해조차 한 적 없다. 사실 겁이 나서 못 한 거라고 봐야 더 정확하다. 겁이 많은 덕분에 어른이 된 아직까지도 깨끗한 손목을 유지하고 있다. 피부 아래에 푸른 정맥으로 혈액이 흐르고 있다. 손목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 심장의 박동이 혈관을 타고 느껴진다. 주기적인 심장의 떨림이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호소한다.


 여전히 가끔씩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처럼 충동 수준까진 아니어도, 감정적으로 힘들어질 때마다 차라리 콱 죽어버려서 편안해지고 싶다. 어쩌면 우울증을 겪으면서 '힘들다' '슬프다'라는 감정을 '죽고 싶다'라는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우리는 자살은 나쁘다고 배운다.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쁘고,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건 더 나쁘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한 주인공에게 누군가 수화기 너머로 "너 나쁜 생각 하는 거 아니지?"라고 묻는다. 어쩌다 뉴스에 누군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나오면 인터넷은 그 자를 비난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은 천인공노할 죄인으로 기억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화가 난다. 어떻게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을 이렇게나 매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절망한다. 보통 사람들은,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없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사람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저렇게 함부로 자살을 죄라고 단정 짓는구나.


 도대체 왜 자살이 나쁜 거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이렇게 말한다. 남겨진 사람들이 슬퍼하니까. 친구, 가족, 연인 모두가, 그 사람의 자살로 인해 슬퍼하고 상처 받으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반박한다.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은 그렇게 잘 이해해주면서, 왜 우리의 슬픔은 하나도 고려해주지 않냐고. 우리를 낭떠러지로 몰아넣은 고통은 왜 못 본 척하고 다 우리 잘못이라고 하냐고.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다. 시련을 마주하면 그것을 극복하기보다 무너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자살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죽고 싶은 마음은 감당 불가능한 외부의 압력과 우울증으로 인한 뇌 기능 저하의 결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자격으로 자살로 떠난 자를 욕하는가. 그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슬픔은 전혀 헤아리려 하지 않은 채, 단지 그가 스스로 죽었다는 결과만 놓고 그를 비난하는 것은, 알량한 도덕적 우월감을 얻기 위한 비겁한 짓거리에 불과하다.




 그때의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 나쁜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큰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모두가 자살은 나쁘다고 했기에, 죽고 싶어 하는 건 나쁜 생각이라고 했기에, 그래서 이것조차 내 잘못인 줄 알았다. 만약 그때의 나에게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쁜 게 아니라고, 너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누군가 알려주었다면, 내 우울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여기서 말하고자 한다. 자살은 나쁜 게 아니다. 자살은 슬픈 것이다. 죽고 싶지 않다는 본능으로도, 살아야겠다는 의무감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떠안아야 했던 나약한 인간의 슬픈 결말이다. 나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겪었을 고통과 슬픔을 기억해주고 싶다. 그의 인간성과 도덕성을 비난하기보다, 그가 천국에서라도 평온한 안식을 얻기를 기도해주고 싶다.


 그리고 오늘도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픈 밤을 보내고 있을 누군가에게, 당신은 아무 잘못 없다고, 그저 우울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을 뿐이라고, 당신은 절대 나쁘지 않다고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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