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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Jan 16. 2021

아빠가 엄마를 칼로 찌르려고 했다

내가 왜 우울증에 걸렸을까 : 죄책감

 남자가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질렀다.
 

 프라이팬이 순식간에 공중을 날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후줄근한 난닝구 민소매 티가 걸린 남자의 가슴팍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남자의 동공이 커지더니 검은자 사방으로 나타난 흰자가 분노를 드러냈다. 남자는 자신의 앞에 양팔을 허리에 짚은 채 서 있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 또한 남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여자의 입에서 남자를 향한 비방과 욕지거리가 언어의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쏟아져 나왔다.


 남자와 여자 모두 입을 열고 소리를 뱉고 있었지만, 대화는 진작에 종료되었다. 둘 사이에는 대화가 아닌 날 선 감정이 오고 갔다. 누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느냐 싸움이었다. 싸움의 승자는 여자였다. 남자는 여자를 밀치고 싱크대 밑 하부장을 열어재꼈다. 식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몸을 홱 돌려 오른손을 여자를 향해 뻗었다. 칼끝이 여자의 가슴 앞에서 돌연 멈추더니 심하게 떨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막힌 듯 칼날은 더 이상 직진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발작하듯 진동했다.


 “이…, 이…!”


 인간은 분노가 이성을 지배하면 언어 기능을 상실한다. 그 상황에서는 말보다는 상대를 노려보는 눈빛이 더 많은 감정을 담기 마련이다. 여기 칼을 든 남자와 칼에 찔릴 뻔한 여자처럼 말이다.


 “뭐, 이걸로 찌르게? 그래, 찔러봐! 이 썅놈 새끼야! 찔러보라고!”


 여자는 지지 않고 남자를 노려보며 비명에 가까운 말투로 말했다. 여자는 칼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생명의 위협도 느끼지 못할 만큼 분노에 잡아먹힌 것이었다. 여자는 더더욱 칼에 가까이 다가가며 비명을 질렀다. 칼이 다가오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다가가겠노라고, 그렇게 스스로 죽겠노라고 울부짖었다.


 남자는 결국 여자를 찌르지 못했다. 조금만 더 팔을 뻗었으면 여자를 찌를 수 있었을 텐데. 차마 사람을 죽일 용기는 없었는지, 그 와중에도 살인자는 되기 싫었는지 모를 일이다. 대신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식칼을 바닥에 내던지고 방에 들어갔다. 몇 분 후 남자는 작업복과 모자를 걸치고 방에서 나왔다. 곧장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떠나다 말고 뒤를 돌더니 자기 자식을 바라보았다. 어린 자식들의 눈은 눈물과 공포로 차 있었다. 그 공포는 남자를 향해 있었다. 남자는 현관문을 부실 것처럼 쾅 닫았다. 그 뒤로 몇 달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벽에 기대 쓰러지듯 바닥에 앉더니 몇 시간이고 소리 내어 울었다. 가스레인지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집안은 기름 냄새가 가득했다. 가스레인지 후드가 웅웅 소리를 내며 작동 중이었으나, 집 전체에 숨 막힐 정도로 짙게 깔린 냄새를 모두 없애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자식들은 이 모든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중 남자아이는 당시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에 불과했다.




 내가 왜 우울증에 걸렸을까


 이 질문의 답을 생각하면 항상 두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그중 첫 번째 기억은 초등학생 때 기억이다. 아빠가 엄마를 칼로 찌르려고 했다. 내 두 눈 앞에서. 태어나서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한 인간의 표정을 그때 처음 보았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었다.


 부모님은 오래전부터 자주 싸웠다. 서로 욕을 내뱉으며, 혐오와 경멸을 주고받으며 싸웠다. 아빠는 크게 싸울 때마다 집을 나갔다. 그리고는 몇 달 뒤에 사과 한마디 없이 집에 돌아왔다. 이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나는 공포에 질렸지만, 동시에 이 과정을 학습하였다. 그래서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방관하였다. 어차피 싸움은 언젠가 끝이 나고, 어차피 아빠는 언젠가 돌아올 거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뭐라고 하든, 아빠가 집을 안 들어오든, 엄마가 쭈그리고 울고 있든 나는 철저히 방관자로서 행동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빠가 식칼을 든 그 순간까지도.


 아빠는 진심으로 엄마를 찌르려고 했다. 아빠의 최소한의 이성이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다면 엄마는 죽었을 것이다. 식칼이 그대로 복부를 파고들어가 피를 철철 흘리고 쓰러져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타겟은 나와 누나였을 것이다. 초등학생에 불과한 자식 둘을 죽이는 것은 자신의 아내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쉬웠을 것이다.


 혼자 있을 때, 잠에 들 때, 깊은 우울에 빠질 때면 머릿속에서 이때 기억이 떠오른다. 다만 살짝 변형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엄마가 칼에 찔린 경우의 수로. 머릿속에서 엄마가 죽어가는 모습이 끝도 없이 되풀이된다. 시체가 된 어린 나와 누나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피가 흥건했다.




 나는 극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가 죽을 뻔한 그 상황에서도 나는 가만히 있었다. 말렸어야 했다. 아빠가 칼을 든 순간 튀어나가서 막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끝까지 뒤에서 구경하였다. 두 눈은 뜨고 있었지만, 귀와 입은 닫혀 있었고, 팔과 다리는 잘려 있었다. 나는 이기적인 목격자였다.


 그렇게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엄마와 아빠가 또 싸울 때마다, 나는 여전히 뒤에서 방관하였고, 새로운 죄책감이 쌓여갔다. 죄책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는 이 눈덩이를 굴리는 법밖에 몰랐다.


가정폭력을 당하거나 부부싸움을 목격한 아이는 그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겨 죄책감을 느낀다.


 어느 날 티비에서 한 문장을 보았다. 아이는 부부싸움의 원인으로 자기 자신을 탓하고, 그래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문장이었다. 나는 이 글을 보고 무언가 깨달았다. 마음속에 우두커니 놓여 있던 죄책감의 정체를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죄책감의 정체는 후회였다.


 아빠가 칼을 드는 걸 막을걸,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걸 말릴걸, 내가 더 착한 아이였으면 싸우지 않았을 텐데, 내가 없었다면 싸울 일도 없었을 텐데. 이런 쓸데없는 후회가 바로 죄책감의 정체였다. 내가 무언가 했다면, 더 나아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부모님이 싸우지 않았으리라는 이상한 결론.


 나는 지금이라도 어린 나에게 말하고자 한다. 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어린 네가 가만히 있었던 건 당연한 행동이라고. 너는 단지 힘없고 약한 어린 아이였다고. 그 누구도 너를 탓하지 않는다고. 너는 방관자가 아니라 피해자일 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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