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다시 일어서고, 뼈는 다시 붙는다
“엄마…….”
아침을 먹다 말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내가 이 말을 꺼낸 순간 얼마나 혼이 날지 두려웠다.
“나… 팔 아파….”
숟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왼손을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왼손을 식탁 위로 꺼내 허공에 들자 힘없이 축 늘어졌다. 엄마는 깜짝 놀라며 언제부터 아팠냐고 물어봤다.
“…어제부터.”
아동센터에서 여기저기 많이 놀러 다녔다. 박물관을 가기도 하고, 썰매장을 가기도 하고, 바다를 가기도 했다. 사실 학교에서 간 것인지 센터에서 간 것인지 헷갈린다. 현장학습이라는 건 일주일만 지나도 대부분 기억에서 잊힌다. 어린이의 뇌가 그런 시시한 경험을 다 기억하기에는 세상에 재밌는 일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아이 손을 잡고 이곳저곳 쏘다닌다. 이 경험이 아이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다. 방학이면 센터에서 꼭 캠프를 갔다. 이때는 계곡으로 캠프를 갈 예정이었다. 조를 나누어 장기자랑을 하기로 했다. 우리 조는 MC몽의 서커스를 부를 예정이었다. 나는 종이에 가사를 적고, 뮤비 동영상을 돌려보며 연습했다. 며칠이 지나자 나는 가사를 안 보고도 완곡할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거울 앞에서 파닥거리면서, 춤도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했다.
캠프를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나는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배가 고파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던 것 아닐까. 아무것도 없는 아스팔트 주차장에서 별안간 넘어졌다. 뭐, 남자아이가 뛰어다니다 넘어지는 것쯤은 별 일 아닐 수 있다. 문제는 내가 넘어진 곳은 주차장과 보도블럭 사이 턱이 툭 튀어나온 곳이었다는 거다.
나는 왼 손목을 도로턱에 부딪혔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 몰려왔다.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손목을 돌리면 신경이 끊어질 듯이 아팠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팔을 다친 나는 어떻게 했냐. 그대로 집에 돌아가서, 팔을 다쳤다는 사실을 숨겼다. 엄마에게 혼날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예전에 아파서 혼난 경험이 있던 걸까?
그날 저녁 메뉴는 삼계탕 아니면 닭죽으로 기억한다. 복날을 맞이하여 닭요리를 먹었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어보았다. 손이 벌벌 떨렸다. 나는 엄마가 눈치챌세라 바로 오른손으로 밥을 먹었다. 오른손잡이인 게 다행스러웠다.
다음날 아침, 고통을 참다못한 내가 엄마에게 팔을 다쳤다고 고백했다. 엄마는 깜짝 놀라며 나를 병원에 데려갔다. 난생처음 엑스레이를 찍었다. 골절이었다. 하마터면 성장판을 다칠 뻔했다. 의사는 내 왼팔에 깁스를 했다. 내 팔이 김밥처럼 깁스에 둘둘 말렸다. 나는 손가락을 꿈틀거려봤다. 이게 대체 뭐시당가.
여름에 깁스를 하는 것은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깁스를 벗기면 짱구아빠 양말 냄새가 난다. 팔이 땀에 절고, 테이프가 붙은 곳에 검은 때가 낀다. 센터에 가면 깁스를 벗어 에어컨 입구에 왼팔을 갖다 대었다. 친구들은 냄새난다며 저리 치우라고 난리였다. 이때 경험으로 나는 앞으로 뼈가 부러져도 절대 깁스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왼팔에 깁스를 두른 채로 나는 계곡으로 갔다. 의사는 나보고 절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푸른 녹음이 바람에 찰랑거리며 그늘을 지고, 미꾸라지가 꼬불거리며 물장구치고, 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줄기차게 흐르고, 친구들이 꺄아 소리 지르며 물장난 치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왼팔을 하늘 높이 든 채로 계곡에 들어갔다. 깁스에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계곡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수심은 적당히 가슴께에 수면이 닿을 정도였고, 조류도 적당히 버틸 만했다.
맨발로 잔돌을 밟으며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 다녔다. 깁스 바깥에 삐죽 튀어나온 손가락으로 새우깡 봉투를 들었다. 그리고는 이 친구 저 친구 옮겨 다니며 과자를 먹였다. 물장난을 칠 수는 없으니 과자 장사라도 할 생각이었나 보다.
밤에는 캠프파이어를 했다. 아이들이 둥그렇게 앉은 가운데에 장작을 쌓고 기름을 뿌린 다음 불을 피웠다. 불꽃이 가파르게 타오르고, 허공에 불똥이 튀어 올랐다. 친구들의 얼굴이 오렌지색으로 빛났다.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우리에게 녹아들었다.
래크레이션 강사는 아이들에게 촛불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종이컵 바닥을 뚫어서 촛불을 꽂은 것이었다. 촛불에 불을 붙이고, 강사는 “집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세요…”라면서 이상한 멘트를 하기 시작했다. 그 멘트에 아이들이 하나씩 눈물을 훌쩍였다. 나는 대체 왜 우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멀뚱멀뚱하게 서 있었다. 장기자랑은 대체 언제 시작하는 건가 하며.
우리는 캠프파이어 앞에서 장기자랑을 했다. 나는 팔이 부러진 관계로 참여할 수 없었다. 연습 엄청 열심히 했는데. 아쉬운 나머지 우리 팀이 무대를 할 때 나는 관객석에 앉아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 장기자랑을 위해 랩까지 마스터했던 참이었다.
한 달 정도 지나서야 나는 드디어 깁스를 풀 수 있었다.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맡은 왼팔은 건강하게 움직였다.
아이는 뛰어다니다가 가끔은 넘어지고, 뼈가 부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아이는 다시 일어서고, 뼈는 다시 붙는다. 나는 그날 깁스를 한 채 보았던 캠프파이어를 잊지 못한다. 그 불꽃은 끊임없이 어두운 여름밤을 밝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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