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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팰롱팰롱 Apr 28. 2021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글

<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 이번 북클럽에서 내가 지정한 책이었다. 원래는 한동안 화제였던 <팩트풀니스> 했다가 올해가 박완서 선생님 타계 10주기라고 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같아서  책으로 바꾸었다. 이상하게 < 남자네 >  번이나 읽었는데  책은 한때 엄청나게 유행했던 책인데도 읽은 적이 없다.  정확히는 < 남자네 > 외에는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책을   번이나 읽게 되었냐면 문체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스치듯 읽은 어느 평론에서 선생님의 문체가 아주 여성적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읽었던 < 남자네 > 그런 느낌을   받은  같아서 다시 한번 느껴보려고 읽어봤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문체가  책에서는 애매하게 느껴졌다.

그런 선생님의 문체를 제일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자전소설이자 성장소설 그리고 연작 소설로 이 책에 이어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리고 <그 남자네 집> 순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두 번째 소설을 읽고 있으니 셋 중에서 비교해보자면 그 특유의 섬세한 문체는 첫 번째 책인 이 책에서 제일 잘 나타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배경이었던 것 같다. 뒤의 두 편 다 한국이 굉장히 어렵고 모두가 굶주렸던 시절을 살았던 평범한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그에 반해 첫 번째 책은 아이들이 산으로 들로 다니며 풀 뜯어먹고 꽃을 찧어다 소꿉놀이하던 어린 시절 주인공의 이야기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책은 마치 원색으로 휘황찬란하게 그린 그런 그림이 아닌, 수채화 물감으로 은은하게 아름다움을 담아낸 그런 그림을 보는 느낌이었달까.

박경리 선생님의 문체가 강직하다고 하면 박완서 선생님의 문체는 섬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섬세함만이 다가 아니고 통찰 또한 아주 깊다. 어떤 상황을 꿰뚫어 보는 힘이라던지 특히 엄마와의 관계에서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의 이면에 숨겨진 모습을 잘 파악하는 듯했다. 책이 펼쳐내는 그 당시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하고 느낀 것인지 후에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대단한 것 같았다.

물론 영양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심리적 중성화 현상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여북해야 그 무렵 나는 북조선이 과연 노동자의 낙원일까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북조선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인구를 증가시킬까를 궁금해하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건 몸으로 벌레처럼 기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폭력에 굴복당했다는 증거겠지만 어쩌랴, 그렇게 생겨먹은 게 보통 사람이 안 미치고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의 한계인 것을.
 
모성애도 이념투쟁의 영향을 받으면 이렇게 악몽이 되고 만다.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더러운 시대였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새롭게 전개될 생활에 대한 예감에 충만한 특별히 아름다운 5월이었다. 그러나 하필 1950년의 5월이었다. 남달리 명철한 엄마도 환멸을 예비하지 않고 마냥 마음을 부풀린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해 6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책은 한국전쟁 이후 모두가 어렵던 시절 주한미군 부대에서 함께 밥벌이를 했던 박수근 화백께서 타계하시고 허망함을 느낀 선생님께서 화가가 자화상을 그리듯 자신도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쓰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상세하다. 마치 지금 화자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쓰고 있는 것과 같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생생하고 주인공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 아주 구체적이다. 박완서 선생님께서 40세쯤 <나목>으로 등단하신 걸 생각하면 그로부터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 이 책을 쓰셨다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이처럼 상세히 쓸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을 기억을 더듬어 쓴 글이어서 이걸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한다면 더욱 놀라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책을 읽고 인상에 제일 많이 남는 인물을 말하라고 한다면 '엄마'일 것이다. 그만큼 선생님과 엄마의 관계가 아주 끈끈한 것 같다. 계집아이는 교육을 안 시키는 것이 당연했던 그 시절, 아들과 서울로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은 후 딸마저 시골에서 서울로 불러왔다. 엄마는 주소를 옮겨서 소위 학군 좋은 학교에 보낼 만큼  극성 엄마였다. 그러는 한편 학교는 그렇게까지 해서 보냈지만 정작 어떤 교육이 좋은 교육인지까지는 알지 못해서 학교 생활에는 무지했던 그런 엄마의 어딘가 모를 허술함. 이런 것들이 이 책의 장점인 것 같다. 특별하고 비범한 무엇인가는 이 책에 없지만 평범하고 우리 주변에 누구나 있을 법한 사람들. 그런 평범한 어느 누군가가 시대를 잘못 만나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했던 이야기. 국가의 이념을 둘러싼 전쟁통에서 내 이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다 살아남은 그런 이야기가 아닌, 살아남기 위해 때론 내 이념도 숨겨야 했고, 혹은 그 이념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조차 못했던 아주 그런  평범한 이들이 혼란 통에 살아남은 이야기 말이다.

엄마가 셈이 바른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이나 막상 자신의 가난한 돈지갑이 새는 것도 모르는 것이 엄마의 또 다른 면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엄마에게 그런 허술한 일면이 있었음을 감사하고 또한 그로 인해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가 "옛다 조조야, 칼 받아라." 하면서 그 동작까지 흉내 내느라 바느질하던 손을 높이 쳐들었을 때 엄마의 손끝에서 번쩍이는 바늘 빛은 칼빛 못지않게 섬뜩하고도 찬란했고, 나는 장검을 휘둘러도 시원치 않을 우리 엄마가 겨우 바느질 품밖에 못 파는 게 안타까워 가슴속에 짜릿하니 전율이 일곤 했다.

계속해서 문체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선생님의 책을 읽다 보니 한 일화가 생각났다. 소설가 박영하가 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짜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생활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짜증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감정을 한 단어로 퉁 칠 수 있으므로 조금 더 구체적이고 다른 표현을 해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 책이 그랬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하나 두루뭉술하니 퉁 치지 않고 섬세하게 잘 벼리고 닦아 아주 맛깔나게 잘 표현한 것. 이런 이유로 선생님의 책이 아직도 사랑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가운데 기둥을 한 팔로 안거나 기대로 앉아 있으면 동구 밖으로 난 달구지 길이 저 멀리 산모롱이 아스라이 사라지는 지점까지 바라볼 수가 있었다.
흰옷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초가지붕마다 뿜어 올린 저녁연기가 스멀스멀 먹물처럼 퍼져 기로가 논밭과 수풀과 동산의 경계를 부드럽게 지워버려, 마침내 잿빛 하늘을 인 거대한 한 덩어리가 되었을 때도 흰옷 입은 사람이 산 모롱이를 돌아오는 것은 잘 분간이 되었다.
대낮에도 뒷간 속은 어둑 시근해서 계집애들의 흰 궁둥이가 뒷간 지붕의 덜 여문 박을 으스름달밤에 보는 것처럼 보얗고도 몽롱했다.
저녁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느야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듯이.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금 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책은 비장하게 끝맺는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 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사진 출처: 배경 사진 -> 네이버 산나물 들나물 대백과

                 책 사진 -> 웅진닷컴에서 출판하고 리디 셀렉트에서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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