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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페트라 May 22. 2023

여행자를 포용하는 곳, 그랜드캐니언

미국 그곳, 그 사람들 - ③

  자연을 사랑하는 여행자라면 꼭 가고 싶어 한다는 대협곡, 그랜드 캐니언. 황색, 적갈색, 청록색 등이 섞인 암벽의 색은 고르지 않았고 햇빛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무지개처럼 다르게 보였다. 오랜 침식작용을 통해 제멋대로 깎여있는 절벽과 암석은 그 세월의 흔적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거슬리지 않고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화려함과 절제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그 협곡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랜드 캐니언 정경>


  절벽은 단단하고 섬세한 구릿빛 근육을 드러내며 굳건히 서있었다. 바람과 물 그리고 세월에 군데군데 깎인 자신의 상처나 굳은살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콜로라도 강물은 혈관처럼 힘 있되 과하지 않게 꿈틀대며 흐르고 있었다. 물은 캘리포니아만을 향해 나아가는 길목의 암석을 오랜 세월 동안 깎아나갔다. 하지만 가는 시간을 억지로 단축시키려고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반대로 그 흐름을 멈추거나 과거에 미련을 두고 거슬러 흐르지도 않았다. 구불구불한 선을 따라 돌아갈 줄 알았고 자신의 속도를 지키며 갈길을 가고 있었다. 흐름을 그저 받아들이는 그는 자신을 방해하는 수많은 여행자들을 겸허히 포용했다. 대협곡의 상처를 밟으며 지나가는 무례한 자들 중 하나였던 나는 경외심 같은 것을 느꼈다. 이전에 가끔 한둘씩만 나타나 자신을 존중하던 원주민이 그리울 터였지만 그는 명상을 하듯 이러한 마음조차도 다스리고 있는 듯했다. 


  새벽에 아직 어둠이 내려앉은 때 처음 이 같은 대협곡을 마주하였다. 과연 어떠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나아갈 것인가 하는 근원적 고민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을 보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아침 8시가 되었고 우리는 헬기장으로 이동했다. 헬기를 타고 감히 그 웅장한 자연을 하늘 위에서 더 가까이 보았다. 그 황홀한 장관이 사진에 모두 표현되지 않았다. 온전히 마음에 담아보자고 생각했을 때 가슴은 걷잡을 수없이 뛰었다.


  그런 장관을 보기 전날, 우리는 근처 캠핑장을 찾아 숙박을 위한 준비를 했다. 미국의 캠핑장은 전국에 수백 개가 있는 만큼 대단히 체계적이고 시설들이 잘 관리되어 있다. 야외수영장과 깨끗한 샤워시설 및 건조기까지 갖춘 세탁실이 기본으로 있다. 그럼에도 자연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관리되어 있어 사슴 같은 순한 야생동물도 마주할 수 있다.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인데, 양지바른 장소를 골라 텐트를 치거나 캠핑카를 세워두고 숙박할 수 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밴에는 텐트를 싣고 다녔다. 이것은 원터치 텐트가 아니라 땅에 직접 망치를 여러 번 두들겨 설치해야 하는 정석적인 텐트였다. 함께 텐트를 이용할 두 명씩 힘을 합쳐 설치하면 약 10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3주간의 미국 여행을 하며 약 15박 동안 텐트를 설치하고 잠을 잤다. 


  하지만 나는 이날, 그랜드캐니언 입성 신고식을 톡톡히 치렀다. 추위를 잘 타는 편이라 봄가을에도 전기담요를 덮고 자는 나에게 그랜드캐니언의 새벽 추위는 혹독했다. 한여름인 8월의 여행이었기에 짐가방에 두꺼운 옷은 챙기지 않았었다. 여러 벌의 여름옷을 껴입고 침낭에 파고들었지만 추위에 다시 잠들기 어려웠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까지 났다. 바들바들 떨어 에너지를 소비한 나의 정직한 신진대사 때문이었다. 결국, 다음날 등반 때 가져가려고 만들어 놓았던 피넛버터 샌드위치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더럽다고 생각하지 마시라! 샤워실과 겸용으로 쓰는 곳이었는데, 워낙 관리가 잘되어 있어 화장실 냄새는 일절 나지 않았다. 특히 내부에 나무벤치가 있고, 히터가 있어 온기가 푸근하게 느껴지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화장실의 온기를 느끼며 새벽에 먹는 피넛버터 샌드위치는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만족스러웠다. 빵의 고소함과 땅콩크림의 단맛은 행복 호르몬을 샘솟게 했다. 배가 부르니 차가웠던 손발까지도 혈액이 도는 느낌이었다. 대신 새벽에 볼일을 보러 온 누군가와 마주쳤다면 서로 굉장히 민망한 상황이 생겼을 것이다. 다음날에 반드시 두꺼운 옷을 한벌 사리라 마음먹고 텐트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대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옷집은? 바로 기념품샵이다! 새벽 일출을 보고 헬기 관광을 마치고 나서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널찍한 기념품샵에 걸려있는 스웨터뿐 아니라 얇은 셔츠, 반팔티 등에는 커다랗게 그랜드캐니언을 대표하는 산이나 순록 그림이 붙어 있었다. 몇 벌 남지 않은 가장 두꺼운 후드 스웨터를 집어 든 순간, 큰 옷밖에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에 고민을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했다. 새벽에 모진 추위를 경험한 내게 어떤 사이즈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고민하는 것은 다소 사치스러운 태도였다. 하지만 막상 4~5만 원 남짓의 옷을 결제하려니 충동적으로 옷을 사지 말고 오늘 새벽만 참아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옷 잘 입는 영국 친구들이 옷이 괜찮다고 떠밀어준 덕분에 사게 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그날 밤 따뜻하게 잠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그 옷은 내가 즐겨 입는 옷 중 하나가 되었다. 넉넉한 품에 어두운 남색을 띠는 옷은 어디에서든 부담 없이 입기에 좋아 한벌 갖추고 있으면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센스가 남다른 사촌동생이 미국의 바이브가 가득한 그 옷을 갖고 싶다고 했을 때 비로소 나는 옷의 진가를 몰라봤었음을 깨달았다. 


  별생각 없이 필요에 의해 마련한 것이 마음먹고 산 비싼 물건보다 더 값진 기념품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때때로 경험하는 이런 아이러니 때문에 인생이 좀 더 맛깔 날수도 있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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