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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운 Feb 21. 2020

빨간 패딩이 잘 어울리는 아이

우리 반 학생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나의 제자 중에 유난히 빨간 패딩이 잘 어울렸던 남자아이의 이야기다.

(가명 : 재준)


5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수학 수행평가를 보던 날,

나는 학생들이 이름 쓰는 것을 까먹지는 않았는지, 빼먹은 문제는 없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 교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숫자를 또박또박 쓰지 않아서 선생님이 못 알아본다면 채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한마디에 갑자기 다들 지우개를 찾는다.

혹시나 열심히 푼 문제가 틀리게 될까 봐, 자신은 숫자를 읽을 수 있지만 선생님이 못 읽으실까 봐 허겁지겁한다.

난 그런 꾸러기들을 보고 웃는다.


그러던 나의 눈에 연필을 쥔 손은 미동이 없고, 고개를 숙인 채 평가지만 응시하는 학생이 눈에 띄었다.

재준이었다.

'다 풀고 눈으로 검산하는 건가?'

다가갔다.

'어라?'

문제를 잘 읽기만 하면 답을 쓸 수 있는 1번 문제를 제외하고는 다른 문제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재준이는 수업시간에 확인할 때 2-3번 수준의 문제까지 풀었던 것 같은데 지금 뭐가 문제인 거지?'


사실 학원 혹은 가정에서 문제를 빠르고 많이 푸는 연습을 한 학생들이 아니라면,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설명을 듣고 이해해서 그 즉시 문제를 풀 수 있더라도
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새로운 문제가 나오거나,
공부한 뒤에 시간이 지나서 문제풀이를 하면 약해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조금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다. 재준이는 학원을 다니지도, 집에서 따로 공부를 하지도 않는다. 재준이가 지금 굉장히 긴장한 상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서 재준이를 위해 원리를 상기시켜주거나 힌트를 주는 행동은 절대 할 수 없기 때문에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재준이에겐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그 시간이 지나가고,

"맨 뒤에 앉은 친구들이 시험지 걷어주세요~"

반 아이들이 평가지를 걷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재준이에게 살짝 말했다.

'재준아, 괜찮아. 선생님이랑 공부 더 할까?'


어떻게든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해 빨개진 두 눈이 차마 나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참은 눈물도 한 방울 떨어졌다. 에구.. 속상했다.






재준이와는 첫 만남이 아니에요.

사실 재준이는 4학년 때도 내가 담임이었다. 1년 동안 재준이의 특성을 잘 파악해둔 덕분에 그의 감정과 상태를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연임제의 장점을 느꼈다.

재준이는 성품이 착하고, 순수한 친구다. 친구들에게 큰 소리를 내거나 과격한 행동을 해본 적이 없다. 만들기를 잘하고, 미술시간을 좋아한다. 글씨도 또박또박 잘 쓰고, 건담을 엄청 좋아한다. 칭찬을 받으면 묘하게 웃는다. 친구들과는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낸다. 또 갑자기 '선생님'을 부르며 주말에 형아들과 놀러 갔다 온 이야기를 자랑하곤 하는 아이였다.


재준이는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오면서 봤던 진단평가 결과가 좋지 않아서 학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외부 강사가 와서 재준이를 가르쳐주었는데,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아이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잘 참여한다고 하셨다. 정말로 프로그램을 하면서 수학에 자신감을 보이고 성취도가 높아졌다.


덕분에 4학년에서 배운 내용을 물어보는 5학년 진단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다 혼자 힘으로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으로만 공부를 하려니 조금 벅찼던 것 같다.



수행평가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재준이를 불렀다.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솔직하게 말해봐.

선생님이랑 정말 남아서 공부해도 괜찮겠어? 다른 아이들보다 집에 조금 더 늦게 가야 해. "

"네 할래요. 어차피 학교 끝나면 집에 바로 가서 상관없어요."

"대단하다. 좋아. 그럼 오늘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다음 주 월요일까지 수학 문제집 한 권을 사 올 수 있겠어?"

"네"


재준이의 의지를 확실하게 물어보고 다독였다.

재준이가 알고 있는 문제인데 갑자기 풀려고 해서 당황했을 거라고.

하지만 재준이는 이거 다 풀 수 있다고.

오늘 못 풀었어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선생님이랑 같이 해보자고.


아이들이 모두 하교를 하고, 재준이 어머님께 전화를 했다.

오늘 수학 수행평가 시간에 일어난 일과, 내가 재준이에게 제안한 것, 그리고 재준이의 의사표현을 알려드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의사를 여쭤봤다. 흔쾌히 대답해주셨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출처 unsplash, Jonas Jacobsson

재준이는 정말 열심히 했다. 정말로.

매일 남아서 문제집을 가지고 나에게 왔다.

오히려 가끔 내가 집에 가서 쉬라고 보냈을 정도다.


선생님 오늘은 어디 할까요?


내가 수업시간에 가르쳐준 내용보다 더 심화된 내용이나 다른 방법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 날 배운 수업내용과 관련된 문제를 풀게 하고, 혹시 틀리거나 못 풀면 다시 생각하게 하고 설명하면서 점검해주는 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확신이 있었다. 이 정도만 해줘도 재준이는 두배, 세배 더 잘할 거라고.


재준이를 보고 생각했다.

'5학년 일 년 동안, 재준이가 앞으로 혼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습관을 만들어줘야겠다.'

재준이는 가능성이 있는 아이다. 옆에서 조금만 지원해주면 자신의 능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다.


내년, 내후년 그리고 학교급이 올라갈 때 즉 미래를 떠올리게 되었다. 만에 하나, 혹시라도 재준이가 의지가 있는데 아무도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상상만 해도 너무 속상했다. 그래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재준이랑 그렇게 한 학기를 공부했다.

2학기가 시작되고 재준이는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문제집 또 사 와도 되나요?"


그럼 내가 뭐라고 하겠나.


"그럼 당연히 되지."


나 혼자 일 년의 계획을 그리고 있긴 했지만 재준이가 먼저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특하다. 1학기에는 오늘 배운 내용에 따라 교사인 내가 공부할 곳을 정해줬다. 2학기부터는 재준이가 배운 내용을 떠올려서 어디까지 풀면 좋을지 정해 보게 했다. 채점도 그동안 내가 해줬지만, 이젠 스스로도 해보게 했다.


재준이가 스스로 결정해서 남았기 때문에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채점을 할 때 꾀를 부리지 않는 것이다.

만약 선생님이 강제로 남게 하거나, 부모님의 압력이 있었다면 공부하는 아이의 목적은 집에 얼른 가는 것이다. 하지만 재준이는 배우고 싶고, 알고 싶어서 남았기 때문에 성실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학습발표회 날.

재준이 어머니가 오셨다.

나에게 하신 말씀을 퇴근하면서 되새겼다.

"재준이가 선생님이랑 남아서 공부하는 걸 너무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나름 나 자신이 그래도 교사라고 할 수 있구나 하며 뿌듯해지면서도 나의 의무를 감사하게 생각해주시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준이 본인은 남아서 공부를 한다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혹시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처음 재준이가 공부를 시작할 때, 학기 중간 종종 이렇게 말을 했다.


"재준이는 선생님과 공부를 하고 싶어서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문제집을 직접 사 왔어요. 그래서 선생님이랑 남아서 공부를 하는 거예요. 혹시 재준이처럼 남아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환영이랍니다. 필요하면 선생님이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줄 수도 있어요."


꽤 많은 아이들은

'부럽다.'

'나도 남아서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

'재밌겠다.'

'학원 가야 해서 못한다.'

의 반응을 보여줬다.

학원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아이들의 반응은 열에 아홉은 '가기 싫다'로 연결된다. 나도 초등학교 때 학원에 가기 싫었다. 어떻게든 하루 빠져보고 싶었다.


내가 혼자서 교육의 시스템을 바꾸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상상해봤다. 재준이처럼 학교에서 남아서 공부를 하더라도 재미있고, 꼭 학원을 가지 않더라도 돌파구가 있다면 참 좋겠다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학원은 단순히 수업내용의 보충, 심화를 넘어서 맞벌이 부부나 가정형편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보육의 기능도 있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출처 unsplash, Annie Spratt

이젠 새 학년 새 학기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텅 빈 교실을 보고 있으면 작별 인사를 나눈 아이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오늘은 유난히 빨간 패딩을 입고 앉아있는 재준이가 떠올랐다.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빨간 패딩을 입은 아이. 등교시간에 교실 창문에서 운동장을 보면 재준이는 눈에 띈다.

빨간 패딩 덕분에.


선생님 이제 혼자 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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