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저물었다. 북궐(北闕)에도 어김없이 어둠이 찾아왔다. 정무(政務)를 마친 신하들은 궐을 빠져나갔고, 나는 이 곳 강녕전(康寧殿)으로 돌아왔다. 나는 지난 몇 달간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다. 밤마다 찾아오는 그놈의 존재가, 날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놈의 목을 베어버리지 못하면, 결국 미쳐버리는 것은 나 자신일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또다시 섬뜩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한겨울의 얼음장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강녕전 전체를 둘러싸고 번져나갔다. 나는 웃음소리에 맞서 검을 뽑아내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차갑고 날카로운 검의 칼날이 내 목에 닿아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칼날은 몇 번이나 내 목을 베었다. 나는 두려움이 앞섰고, 필사적으로 궁녀와 내금위장(內禁衛將)을 불러보려 애썼다. 하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려고 할수록 누군가가 내 입을 더 강하게 틀어막고 목을 조르는 듯했다. 곧이어 온몸엔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발목에서 어깨까지 느껴졌다. 나는 결국 고통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끝내 그 웃음소리의 정체를 또다시 알아낼 수 없었다.
나는 아침이 밝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내 목을 어루만지며 지난밤의 고통을 생각했지만, 내 몸에는 그 어떤 생채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밤에 내가 겪은 사투의 흔적이라고는 내가 흘린 식은땀들 뿐이었다. 나는 서둘러 사정전(思政殿)에 나가 신하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지만 지난밤 나를 찾아온 그놈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전하, 삼군수군통제사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말았다는 급보가 올라왔습니다. 또한 원균은 왜군의 추격을 받아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수군은 현재 춘원포로 후퇴, 정비를 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판옥선이 파괴되어 전투에 임하기가 어렵다 하옵니다.”
병조판서(兵曹判書) 이항복이 말했다.
“아뢰옵기 황공하나 전하, 권율 장군 밑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는 이순신을 다시 복직하게 하심이 어떠하십니까? 그 어느 때보다 사태가 시급하옵니다.”
경림군(慶林君) 김명원이 말을 보탰다.
이순신… 또다시 내 귓가에 그놈의 이름이 들렸다. 패한 적이 없는 장군, 백성들에게 나보다 더 높임을 받는 장군, 왜군들에겐 두려움의 대상…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조정의 명령을 어긴 자. 나는 그 자를 복직시켜야 하는 것인가. 백성의 미움을 받고 있는 내가, 백성의 높임을 받는 자를? 파직하면 그 자도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또다시… 아니지, 대부분의 판옥선이 부서졌으니 천하의 이순신이라도 이번엔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야. 그 자가 패한다면, 그 자 역시 백성들의 원망을 듣게 되겠지. 그리고 그 죄목으로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야.
나는 헛웃음이 났다. 그리고 병조판서와 경림군의 말대로 이순신의 복직을 명했다. 나는 몇 차례의 정무를 더 처리하고 강녕전에 돌아왔다. 강녕전에 돌아왔지만,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밤이 되면 나를 찾아오는 그 웃음소리와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또다시 먼 곳에서부터 점점 가까운 쪽으로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와 함께 지밀(至密) 안에 모든 촛불이 꺼졌다.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오늘은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검을 뽑았고, 검을 쥔 채로 내 지밀에서 놈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침을 삼키며 문 쪽을 응시했다. 그러나 놈은 오히려 내 뒤에서 나타났다. 놈의 차가운 손은 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돌면서 검을 휘둘렀다. 내가 휘두른 검이 바람을 가르며 병풍을 두 동강 냈다. 하지만 놈에게는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그 사이 나와 거리를 벌린 놈은 갑자기 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나는 놈의 얼굴을 보기 위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달빛 사이로 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다리의 힘이 빠져 버렸다. 바닥에 넘어진 채로 다시 한번 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놈은 분명히,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