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잔뜩 흐리며 몇 방울씩 감질나게 오더니 오늘은 추적추적 진짜 가을비가 내린다. 이른 아침, 아니 어젯밤부터 반가운 이들과 연락이 닿았다.
미국 국적으로 아이 셋 모두 미국 땅에 두고 부부만 한국에서 기한제로 각자의 직업에 충실하며 사는 K친구가 좀 서늘해지면 만나기로 한 그 뜨거웠던 지난여름의 약속을 잊지 않고 전화했다. 한국 근무 중인 미군들을 대상으로 가정상담을 하는 친구는 공부에도 욕심이 많아 하루를 거의 48시간으로 쓰고 있었다. 12월엔 또 미국에 들어가서 기약 없이 있을 예정이므로 우리는 꼭 만나야 한다. 만나서 나누는 그녀와의 대화는 모두가 그 자체로 공부요 즐거움이니까.
지난 9월 중순, 두 달 일정을 잡아 미국으로 여행을 떠난 여행작가 모임 Y회장에게도 문자가 왔다. 자동차로 갈 수 있는 북미 최북단 알래스카 북극권 표지선과 북미대륙 최남단 지점 키웨스트를 완주했단다. 허리케인 밀턴을 뚫고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155마일을 달려서..... Y는 내가 여태껏 만나온 사람 중 인생을 가장 도전적으로 즐기는 사람이다. 5년 전 소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신앙과 스스로를 돌보며 살다 얼마 전 다시 병원을 찾았지만 암 때문이 아니었다. 장기 일부를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은 그는 암은 건드리지도 않고 퇴원했다. 암은 삶과 같이 가는 질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른 살의 젊은이다.
오늘 아침엔 아버지 위폐를 모시고 있는 조그만 암자 스님에게 신도방 단체 문자가 왔다. 얼마 전 청평에서 만나 차 한잔 했던 추억이 가을비에 아련해서 개인 문자로 안부를 했더니 가을을 타는지 보고 싶다고 답을 하셨다. 늘 밝고 맑은 스님이지만 개인적으로 문자를 하시는 분이 아닌데..... 가을을 타는 게 확실해 보였다. 그렇지. 우리는 모두 부여잡은 정신줄을 한 번씩 놓고 싶은 나약한 중생이니까.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몇 시간 만에 완독 했다. 2018년 4월 초회 읽었노라 책머리에 적어둔 책을 기필코 찾아내서..... 그녀가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안았고. 나는 그 많은 책을 버리고 양도하면서도 한강의 소설집은 끼고 있었다. 그때는 이 글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까진 몰랐겠지만 다시 읽을 거란 생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 느낌은 더 강렬하다. 다시 읽으면서 적어도 등장인물 모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나도 가을을 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