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를 뒤적이며, 성급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다.
나는 시골에 살면 가장 어려운 것이 일자리 구하기인 줄 알았다. 내가 귀농을 한 것이 아니고 귀촌을 하는 이상, 농사를 지을 것이 아니니까.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답이 바로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어떻게 할 일을 구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일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일보다 더 구하기 어려운 것은 집이었다. 서울에선 돈만 있으면 지낼 수 있는 곳이야 지천에 널리고 널렸는데, 시골은 정말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서울에선 돈이 없어서, 시골에선 집이 없어서 문제였다. 그만큼 정말로, 집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시골 생활을 떠올릴 때 누구나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 하나. 넓지는 않아도 나만의 마당 하나 –텃밭까지 있다면 더 좋겠지- 가지고, 원색의 지붕 하나 달고, 거실의 커다란 창을 통해서는 산과 들녘이 보이는 어여쁜 집. 나 또한 그랬다. 내가 어느 작은 마을에 들어가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시골집, 그러니까 주택에 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야 했다.
일단 마을의 주택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나는 시골에 빈 집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방치해 둔 시골집에 당장 들어간다 한들 내가 뭘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집 고치기는 능력 밖의 일이었고, 그만큼의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될 리도 없었다. 빈 집이라 해서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니었고, 빈 집을 소유하고 있다 한들 이제 막 귀촌을 준비하는 외지인에게 덜컥 집을 내주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또 다른 이유는 차가 없기 때문이었다. 운전면허는 갱신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사실 한국에서 실제 운전 경험은 10년도 더 전에 소리를 악 지르며 강남대로를 달려본 적 한 번뿐이었다. 차도 운전 실력도 갖추지 못한 내가 작은 마을로 들어가 살기란 현실상 불가능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나는 읍내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읍내라니, 읍내. 입에 척척 붙지도 않는 말이었다. 처음 곡성 읍내를 차 타고 지나가며 여기가 어디고 저기가 어딘지 설명을 들을 때가 생각났다. 낮은 건물들이 이어지다 말다, 이어지다 말고 있는 그 읍내란 곳이 어찌나 작게만 느껴지던지, 내가 그 읍내에서 집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곡성읍으로 범위를 좁혔지만, 정작 중요한 건 정보를 얻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다들 어떻게 집을 구하고 빌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네이버 부동산에 검색을 해봐도 나오는 게 없었다. 대신 내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교차로였다. 교차로라니, 세상에. 제대로 들춰본 적도 없던 것이었고, 사실 아직까지 교차로를 통해 무언가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곡성 교차로는 없었고, 남원 교차로의 부동산 코너를 찾아서 그중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곡성’ 란을 찾아야 했다.
3주를 보낸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던 사무장님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는 부동산에 집도 땅도 내놓지 않아. 아는 사람끼리만 알고, 처음에 집 구하러 다닌다 땅 사러 보러 다닌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 그런데 저 외지인 좀 오래 있는다 하면 그제야 조금씩 정보를 알려주기 시작하는 거야.”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나마 2년 전에 이곳에 자리 잡은 지인과 그를 통해 알게 된 몇 명을 통해 내가 집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저 그들이 내가 살 집을 나만큼이나 절실하게 찾아 줄 리도 없는데, 괜찮은 집을 구해줄 거라 기대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그렇게 편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교차로를 통해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정보를 얻을 수야 있겠지만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는 것이 썩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신축 빌라가 하나 생기고 있다는데 연락처 줄 테니 전화 한 번 해봐요. 집이 그래도 어느 정도 구색 갖추고 깔끔해야지. 급하다고 당장 아무 데나 들어가면, 뭐 급한 대로 당장은 지낼 수 있어도 정 붙이기는 힘들 거예요. 천천히 스며드세요.”
맞는 말이었다. 몇 번의 지난 경험이 떠올랐다. 프랑스 파리에 사는 20개월 동안 거처를 다섯 번 옮기던 일이나, 탄자니아 다레살람에 살며 너무 성급하게 두 번째 집을 구해서 6개월 내내 고생하던 일이 눈앞에 펼쳐지자 눈을 질끈 감게 되었다. 아찔했다. 다신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되었다. 적어도 조금 더 오래, 진득하니 머물고자 한다면 말이다.
곡성에 집을 구하는 동안은 광주에서 지내게 되었다. 사실, 잠시 서울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서울로 올라간다면 다시는 곡성으로 내려오기 힘들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가리라’ 마음먹고 떠나온 모든 곳들이 그러했다. 일단 떠나면, 그곳은 너무나 멀어진다. 늘 그리운, 가슴속에 두고두고 품게 되는 곳이 될 뿐이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는다 한들, 시간이 지나면 손 내밀어도 절대 닿을 수 없게 되는 것. 그렇게 현실 속에서 절대 다시 손에 쥘 수 없는 아득한 것이 되어가는 것이다. 곡성마저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잊히는 곳이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새로운 인연의 도움을 받아 광주에 잠시 지낼 곳을 마련할 수 있었고, 다행히 광주에서 곡성을 오가는 일은 그리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타이밍이 맞으면 차를 얻어 타고 다닐 수도 있었고, 편도 한 시간으로 오가는 버스도 많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곡성을 향했다. 기대하는 마음이 비집어 나오는 것을 꾹 누르며 곡성으로 향하는 길과 실망감이 자꾸만 쌓이는 광주로 돌아오는 길이 반복되었다. 교차로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들여다보는 것이 되었다. 촘촘하고 작은 글씨를 뚫어지게 보면 눈이 아팠지만, 눈 아픈 걸 따질 형편은 아니었다.
천천히 스며들고자, 성급하지 않으리라 마음은 먹었지만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기에 쉽지는 않았다. 서울에 갈 일은 자꾸만 생기고 친구들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 일정은 ‘집을 구하고 난 뒤’로 계속 밀렸다. 이렇게 간절히 바라는데, 그래도 곧 뭐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만이 소리 없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