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일도 모든 것이 정해지면 그때 가족들에게 나의 결정에 대해 알리려고 했다. 지금껏 나름 인생의 큰 결정을 내릴 때, 그러니까 직장이라던가 거처를 옮긴다거나 긴 여행을 떠난다거나 할 때, 늘 모든 것이 결정된 후에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맞다, 그냥 통보였다. 내 결정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면 결정은 혼자 힘으로 내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정말 부모에 대한 배려 없는 자식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에서 함께 살던 언니에게는 먼저 운을 띄어 놓았다. ‘언니 나 할 말 있으니까 전화해.’라는 내 말을 듣자마자, 언니는 내가 또 무슨 큰 결정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네가 할 말 있다고 할 때마다 가슴 철렁거리는 거 알아?”
그 말은 엄마도 예전에 나에게 했던 말이다. 시골로 내려와서 살겠다는 나의 의지에 언니는 생각보다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며칠 전 언니가 꿈을 꿨는데, 내가 꿈에 나와서 천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언니는 내가 스위스를 다시 돌아가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 집을 얻으려고 보증금을 빌린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래서 얼마나 필요한 거야? 말해봐.”
어안이 벙벙했다. 절대 언니에게 돈을 빌릴 생각은 없었다.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이 결코 여유로운 수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니에게 손을 벌릴 처지 또한 아니었다. 그냥 얼마 되지 않는 나의 수준에 맞는 집을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돈을 다 쓰기 전에 일은 어떻게든 구하겠지,라고 생각했고.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빌리지 말고 필요하면 꼭 이야기해!”
언니 또한 신신당부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속으로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꼭 혼자 힘으로 살 집을 구하고 말리라고 다짐했다. 언니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그래, 어쩌면 부모님과의 대화도 그리 어렵진 않을지도 모르겠다, 해외도 아니고 한국에서 살아보겠다는 건데 뭐.
스위스에 있을 때는 3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연락하던 둘째 딸이었지만, 한국에 있으니 연락이 더욱 뜸해졌다. 게다가 연고 하나 없는 새로운 곳에서 살 기반을 마련해 보려 이리저리 뛰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더욱 부모님에게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다. 연락할 틈은 충분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일단 아직 서울로 올라가지 않은 것에 대한 이유를 밝히기는 것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두려웠다.
하지만 계속해서 부모님 연락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하도 연락이 잘 닿지 않으니 아빠가 결국에는 나보고 다단계 회사라도 들어간 거냐며 핀잔을 주었다. 아직 집도 일도 결정되지 않았지만, 부모님에게 나의 결정에 대해 알려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나의 메시지를 읽은 아빠는 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을 걸 알아서였는지, 아빠 역시 메시지로 내게 답했다. 내가 카톡에 답이 없자, 아빠는 문자도 보내기 시작했다.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나도 맞받아쳤다. 나의 답답함은 커져만 갔다.
“네가 지금 집도 일도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게 아니라 그래. 그러면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나의 이야기를 들은 언니의 대답이었다. 하긴, 언니 말도 맞다. 그런데 나는 정말 아빠가 나보고 다시 해외를 나가라 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물론, 아빠도내가 곡성이란 시골로 귀촌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반면, 엄마는 말이 없었다. 내가 장문의 카톡을 보낸 이후, 엄마는 가족 단톡방에도 나와의 개별 톡에도 아무런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다. 전화도 하지 않았다. 내가 새로운 결정을 내릴 때마다 엄마는 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이렇게, 그냥 묵묵히 기다려주는 것.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것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이며, 왜 그런 것인지 더 이유도 묻고 싶을 것이고,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을 것이다.
“엄마는 너 믿어. 알아서 잘하니까.”
예전에 엄마가 했던 말이다. 엄마는 이번에도 나에게 무언의 응원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빠의 반응에 속상함이 한가득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털어놨다는 것에 한시름 놓고, 이제 정말 이대로 밀고 나가면 되겠다는 의지에 불타올라 또 한시름 놓았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로 부모님께 말씀을 드린 것에 대하여 계속해서 무언가 큰 구멍을 드러낸 기분이 들었다. 차곡차곡 정리된 모습을 멋지게 보여드려서 안심시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역시나 그건 내 욕심이었다. 귀촌은 예상보다도 더 만만한 것이 아니었고, 내가 빠르게 움직인다고 바로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며칠 뒤, 나는 역시나 집을 보러 광주에서 곡성으로 가고 있었다. 내가 하루빨리 결정을 뒤엎고 서울로 올라가길 바라는 아빠의 얼굴이 창 밖에 맺혀 있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결코 흔들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마음이 편한 것 또한 아니었다.
창 밖 풍경 속 도시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어지러운 도로와 건물들이 잦아들고 시원하게 펼쳐진 시골의 풍경이 창 밖을 뒤덮기 시작했다. 곡성에 진입한 것이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주 상큼한 허브 향이라도 맡은 듯 머릿속에 맑아졌다. 그러자 자연스레 미소가 나왔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지금, 내가 지금 참 옳은 일을 하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