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없고, 할 일도 모르겠지만
3주 동안 지내던 숙소에서 나오는 날, 나는 남해로 향했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너무 멀어 갈 엄두도 나지 않던 곳이었다. 그런데 곡성에서 출발하여 얼떨결에 남해로 하룻밤을 보내러 가게 된 것이다.
캐리어에 다시 짐을 꾹꾹 눌러 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참 여기저기 많이도 함께 다닌 캐리어였다. 떠나고 돌아가기를 반복하던 캐리어는 정말 많이 더럽고 여기저기 성한 곳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지퍼가 다 닫히고 바퀴가 굴러가니 여태 쓰고 있었다. 캐리어도 많이 지쳐 보였다. 거울을 보니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냥 지친 것만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더러운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여전히 캐리어는 밝은 민트색이었다. 내 모습도 깊은 고민을 끌어안고는 있을지언정 -바다를 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남해에서 보는 바다는 눈이 부셨고, 처음 가본 남해의 독일 마을은 참 정갈하고 예뻤다. 평일에 찾은 관광지는 한산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여유롭게 소시지에 낮맥주를 마시고, 풍경을 눈에 담았다. 빈티지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뱅쇼를 홀짝이다가, 이름 모를 해변에 차를 대고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걷기도 했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숙소를 잡았지만 해가 지고 나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들리지 않는 파도 소리를 듣겠다며 커다란 창에 귀를 참 가까이도 대어보았다. 무언가 내가 찾고자 하는 답을 바다가 알려주기라도 할 것처럼.
다음 날, 날이 밝았을 때 남해에는 엄청난 바람이 몰려와 있었다. 곡성에서 아무리 추워도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던 세기의 바람이었다. 바람이 많은 것을 가져가고 또 많은 것을 새로 채워주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밀린 고민거리들을 가지고 가서 다시는 내게 전해주지 못할 정도로 멀리 떠나가기를. 그리고 전에 없던 결정을 지을 수 있는 용기를 내게 잔뜩 불어넣어 주기를.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앞에 두고 카푸치노를 한 잔 마셨다. 이국적인 풍경에 그리운 곳들이 스멀스멀 생겨났지만 그곳들은 너무나 멀었다. 그리운 곳을 곱씹다 이내 너무 멀리 있음을 깨달았다. 전에는 물리적 거리가 멀다고 해서 마음의 거리까지 멀지는 않았는데, 왜 갑자기 변한 걸까.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닐 텐데, 이상했다.
갈치조림을 맛있게 먹고 나자 남해를 떠나서 아쉬운 마음이 더 커졌다. 바다가 보이던 숙소에서 보내준 쿠폰을 고이 간직한 채, 금방 또 오리라 생각했다. 곡성에서 남해가 그리 멀지 않음에 다행이었다- 고 생각하자, 이미 내 마음은 곡성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곡성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제 진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음을 알았다.
나, 잠깐만 30분만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래, 생각할 만큼 충분히 시간 가져도 괜찮아.
대화가 멈춘 차 안은 조용했다. 음악 소리가 고속도로 위에 차분하게 깔렸다. 내가 결정을 내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주 어쩌면, 곡성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부터, 아니 어쩌면 민트색 캐리어와 함께 서울 집을 나오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이미 곡성 3 주살이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순간부터 내 마음은 곡성에 멈췄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고민했던 이유는 너무나 단순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곡성에서 뭐 해 먹고살지?
곡성에 정착하신 지 어느덧 3년 차가 되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지인을 찾았다. 결정은 했지만 그것이 내 입을 통해 문장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러니까, 곡성에 살아 보고 싶어요. 지방의 다른 곳들도 이곳저곳 경험해 보고 진짜 나한테 맞는 곳을 찾을 수 있을 수도 있을 테니 조금 더 여러 곳을 다녀봐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여기에 그냥 마음이 끌려요. 어떻게 보면 너무 무모하고 가볍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껏 제가 해온 결정들에 비하면 참 많이 고민했어요.”
따뜻한 차가 담긴 컵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마음이 미약하게 일렁거렸다. 바람에 엉겨 붙기 전 고요했던 바다가 지닌 보이지 않는 파도처럼.
“사실 지금까지 해외로 거처를 옮길 때마다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던 건, 아무래도 ‘할 일’이 있어서였던 것 같아요. 새로운 곳에 가서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해 두려움이 없기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살 집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돌아오는 대답은 내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건 도시적인 마인드야. “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조금은 놓아야 하는 걸까. 만만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이지 어쩌면 해외에 나가 사는 것보다 더욱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은 수긍이 가기 시작했다. 생활환경이나 반경, 그리고 접하는 이들과 만들어내는 소통이 분명히 도시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므로. 옳고 그름이 아닌, 정말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는 못할지언정- 받아들이는 작업이 꽤 오래 걸릴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들, 내가 몸소 배워오고 적용해 왔던 것들, 의심 없이 행하던 것들이, 뭐랄까 부정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이곳에서 크게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조금 슬퍼졌다. 하지만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진짜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일단 집을 구해야 했고, 일자리도 구해야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일단 곡성으로 거처를 옮겨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불안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설렘이 불안보다 컸던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편안해진 그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갔다. 아직 무르익으려면 한참이나 남았지만, 적어도 단단해질 준비는 제대로 마친 것만 같았다. 이제 정말 시작, 또 다른 새로운 장(chapter)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