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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Mar 17. 2023

04. 처음 맞는 겨울

차가울수록 맑은 겨울 속에서 익숙해져 가는 것들

곡성의 1월은 참 추웠다. 남쪽지방이다 보니 서울보다 훨씬 따뜻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정말 대단한 착각이었다. 들판 위를 마음껏 뛰노는 바람이 코끝에 닿으면 너무나 차가웠다. 볼은 하염없이 차가워지기 일쑤였고, 나는 자주 움츠러들었다.


따뜻한 옷도 많지 않아서 더 추웠다. 스위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한국에 끽해야 한 달, 길어야 두 달 있다가 가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그래서 스위스에 있는 옷들을 챙겨 오지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작년 10월 중순에 한국으로 급히 (잠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이 너무 추워져서 패딩을 꺼냈다는 이야기를 한 친구로부터 들었다는 것. 그래서 부랴부랴 초겨울용 패딩 하나를 챙겨 왔다는 것이다.


그 초겨울용 패딩을 가지고 한겨울의 곡성을 버티기에는 사실 쉽지 않았다. 서울에서 짐을 싸서 내려올 때부터 옷이 별로 없기도 했었고, 대단히 추울 거란 생각 자체를 못했기에 껴입을 것도 많지 않았다.


3주 살기에 참여하는 동안 잠은 한옥민박에서 잤다. 내가 배정받은 방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환호성을 질렀다. 벽의 세 면에 창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창문과 창문 너머로 보이는 뷰에 상당히 민감한 나로선, 정말 커다란 행운이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시골 풍경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곡성역에서 막 도착했을 때라 마음은 두근거렸고, 그 상태로 창 밖 풍경을 보느라 짐을 풀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자 방에 한기가 돌고 있음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손과 발이 시렸다. 겨울이면 늘 차가워지는 손발이지만, 공기가 너무 찬 탓에 더욱 차가워졌다. 둘이 쓰기에 꽤 넓은 방 한가운데에 이불이 깔려 있었는데, 룸메와 나는 약속한 듯이 그 이불속으로 몸을 구겨 넣기 시작했다. 바닥과 이불 사이에서 피어난 온기는 그야말로 날 녹여주었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불과 닿은 바닥의 면적만이 따뜻했다. 온돌 보일러를 쓰고 있지만, 외풍도 심하고 커다란 창으로 열이 계속 빠져나가서인지 방 안은 너무 추웠다. 그러니 바닥에 누워 이불을 어정쩡하게 덮고 있는 꼴이 되었다. 그러니 난 계속해서 짐을 풀 수 없었다. 다음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직전에야 겨우 이불 밖으로 기어 나갈 수 있었다.



저녁 식사와 술자리를 마친 후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찬 공기가 훅 끼쳤다. 곧장 닭살이 돋을 만큼 냉정한 온도였다. 억지로 씻고 외출복으로 가져왔던 기모 후드 집업까지 입고서야 그나마 떨리던 몸이 진정되었다. 도톰한 수면 양말을 하나 찔러온 것도 참 잘한 일이었다.


믿을 구석이라곤 역시나 이불과 바닥의 사이뿐이었다. 버거의 패티처럼 그 안에 끼어들어가 틈을 최대한 없애려 노력하고 있자니, 서울 내 방의 따뜻한 전기장판이 생각났다. 여기서 지금 뭘 하겠다고 이 추위를 견디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이불 밖으로 내놓은 얼굴은 급격히 차가워졌다. 코끝은 얼어갔다. 후 하고 숨을 내쉬면 어둠 속에서 허연 입김이 눈에 보일 것만 같았다.


야외 취침을 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밤을 보냈다. 맨바닥에서 자서 허리가 찌뿌둥했지만, 온돌 보일러에 등을 지지면서 자서 그런지 생각보다 컨디션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애당초 감기 기운을 살짝 달고 왔던 룸메의 몸상태는 더욱 안 좋아졌다.


알고 보니 우리 방이 유난히 추운 방이었다. 유일하게 창문이 세 개나 나 있는 방이었고, 외풍도 가장 심한 방이었다. 결국 나는 운영진에게 부탁하여 방을 바꾸게 되었다. 바꾼 방에는 내부 화장실이 없어 복도 끝에 있는 공동 화장실을 써야 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방을 바꾸기로 했다. 남은 스무날 동안 야외 취침을 하는 정도의 추위를 견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추위는 첫날 하루로 족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해가 바뀌어도 어김없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참 길어 보이던 3주란 시간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추위에 바들바들 떨던 것이 익숙해지는 건지, 추위 자체에 익숙해지는 건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시골의 이 차가운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참 맑았다. 차가울수록 맑은 것 같았다.


그렇게 추위를 한참 품고 있다가 방 안으로 들어가면 몸이 스르르 녹았다. 온돌 바닥은 참으로 따뜻했고, 가끔은 너무 뜨거워서 자면서 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것마저도 좋았다.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이 새로운 공간에 내 몸이 안팎으로 적응해나가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새삼 좋았다. 한 밤 중에 일어나 차가운 복도의 공기를 가르며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도, 창문을 열면 보이는 산과 밭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온돌 바닥에 뒹굴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어느덧 익숙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익숙했던 것들이 어느덧 잊힌 것이 되고, 새로운 것이 어느덧 편안함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빠르지 않게 진행되는 그 순간을 천천히 눈으로 좇았다. 피부가 두꺼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찬 겨울이 싫지 않았다. 그렇다고 추위에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자체를 즐길 수는 있게 되었다. 오늘도 추울까 하는 걱정보다, 곡성의 겨울 그 자체를 즐겨보기로 했다.


가장 싫어하는 계절인 겨울의 한가운데에 도착한 낯선 곳. 이미 너무 많은 겨울을 겪어보았지만, ‘처음 맞는 겨울’이 맞아주던 곳. 그렇게 겨울을 헤쳐가며 그에 살결을 맞대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다음 계절이 궁금해졌다. 아득하니 멀리 있을 것만 같고, 어쩌면 내가 다시는 겪지 못할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니 조금은 슬퍼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괜스레 조금 더 그곳을 쳐다보았다.


겨울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기는 난생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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