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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Feb 02. 2023

02. 서리를 밟지 않는 마음으로

안갯속 아침 산책



곡성에서 맞은 어느 아침,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 짙은 아침이 처음도 아니었다. 지내던 숙소 이름이 ‘안개마을’이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그날따라 안개가 더욱 가득했다. 커튼을 걷어도 보이는 것이 없었고, 문 밖을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하는 친구들의 대부분은 아침부터 광주로 향했다. 프로그램 중 하나인 셀프 인테리어 실습을 위한 타일, 벽지 그리고 필요한 자재들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급히 끝내야 할 일이 있던 나는 광주에 함께 가지 않고 오전 동안 숙소에 남아있기로 했다.


해야 할 일 때문에 마음은 급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친구들이 떠난 뒤 홀로 남아 아침 시리얼을 꼭꼭 씹어 먹었다. 공용식사공간의 통유리 앞까지 바짝 다가온 안개가 계속해서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안개의 노크 소리에 맞춰 구운 식빵까지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그러고 나서 보틀에 커피를 마저 더 채워서 일어났다.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할 일을 끝내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방까지 들어가는 2분도 채 걸리지 않는 길에서 나는 방향을 틀어버렸다.



나는 두꺼운 안갯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보이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까운 것들에 눈길을 줄 수 있었다. 손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는 것들이었다. 자세히 보고, 또 오래 쳐다보았다. 안개가 짙게 깔리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작아서 아름다웠고, 그래서 더 소중했다.


간밤에 내린 서리로 인해 길이 조금 미끄러웠다. 안개 너머로는 붉은 해가 열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안개도 어쩌지 못하는 강렬한 햇빛이었다. 마을의 길마다 햇빛이 꼼꼼히 들이 차면 서리가 온통 녹아버리겠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그렇게 사라지겠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곧 사라져 자취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기억해야지. 1월 초에 마을의 길마다 얇게 깔린 서리를 내가 기억해야지 싶었다.



나는 그렇게 서리를 밟지 않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길 위를 미끄러져 나아갔다. 그리곤 안개가 허락하는 시야만큼만 바라보았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난 것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을까?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충분한데, 그동안 나는 그 어떤 수많은 것들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던 걸까. 모든 문장과 애절함은 어디로 새어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걸까. 건드리면 고유한 냄새가 내 코끝에 바로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나는 그 거리에서 한참 동안 작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도 어김없이 서리가 내려 있었다.


좁은 공간을 불평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좁을수록 더욱 알맞다는 듯이 눈꽃이 어여쁘게 피어있었다. 자신만큼이나 가느다란 것의 위에 자리를 잡고선 굳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꼭 맞는 옷을 입고 있는 듯, 서리가 만개한 모습을 나는 눈이 시리도록 열심히 바라보았다. 내게 눈 맞춤을 해주지 않아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순수함이었고, 기꺼이 허리를 숙이고 한 뼘 더 다가갔을 때 맡을 수 있는 계절의 냄새였다. 나는 그렇게 자주 멈춰가며 아침 산책을 했다.



곡성군 고달면의 아침 안갯속에서 나는 가까운 것일수록 느끼기 어려웠던 소중함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너무 가까워서 차마 건네지 못했던 다정함을 오랫동안 떠올렸다. 한 걸음을 조심스레 내딛을 때마다 생각했다. 너무 많이, 너무 넓게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어쩌면 가까운 것들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일이 더욱 값진 일이라고.


산책을 마쳤을 때에는 안개가 어느덧 조금은 옅어져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 멀리 있다고 투덜대던 그 언젠가도 함께 희미해졌다. 가까운 것을 밟고 올라서며 시선을 자꾸만 밖으로 돌리던 그 언젠가도 아침 안개와 함께 저물어갔다.


가깝고 작아 그냥 지나쳤던 것들에게 비로소 마음의 한편을 내어준 그날 아침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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