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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로지 Nov 26. 2023

처음 보는 엔딩

들어갈 땐 무겁고 나올 땐 한없이 가벼운


이른 아침 눈을 뜨고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다.

도무지 누구에게 털어놓아야 할지 모를 이야기들을 잔뜩 안고서.


출근준비를 알리는 알림이 울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출근 버스에서 잠깐 오늘 하루를 예상해 보다가 이내 다시 핸드폰 화면 속의 뉴스 기사에 집중해 본다.

나 조차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신이 들지 않던 그날, 나는 출근을 했다.


사원증으로 출입문을 태그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기나긴 사무실의 복도를 지나가며

'이제 이 것도 마지막이겠군'과 '드디어 마지막이 왔네'가 달콤한 씁쓸함을 만들어냈다.


긴 복도를 지나가며 어설프게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눈을 피했다.

늘 먼저 눈을 피하는 쪽은 나였는데 말이다.


텅 비어버린 내 책상 위에 가볍게 가방을 올려두고 그 방 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약속한 시간보다 빠른 시간이었지만 그 방 안에서는 이미 잡다한 소음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난 한참을 그 방 문 앞에 서있었다.

10년을 넘게 이곳을 다니면서도

한 번도 불러보지도 않았던 이름이라서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공간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리다 아무 말 못 하고 주저하다가 손가락으로 살짝 두드려 본다.


'똑똑'

내 노크소리와 동시에 안에서 '들어오세요'라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린다.


"안녕.. 하세요…"

"네~ 들어오세요. 편하게 앉아, 여기 앉아볼까?"

그녀는 주위를 살피더니 주섬주섬 주스와 몇 가지 간식들을 챙겨 온다.


"자.. 그래서 대리님이 요새 어떤 힘든 일이 있었을까?"

"..."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수 있어"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녀는 승리를 예감한 듯 더 대담하게 제안을 시작해 왔다.


"좀 쉬었다 와도 돼. 병가를 쓰고 다시 복직하고 싶을 때까지 쉴 수 있지. 아니면 바로 팀을 옮겨줄까?

뭐 그런 서류나 프로세스 같은 건 생각하지 말자고 우리.

지금 젤 중요한 건 대리님이니까"


그녀는 자신이 엄청난 제안이라도 한 듯이 의기양양 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제안 앞에 지난날의 숱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 전 그냥 쉬고 싶어요. 휴직 말고요, 병가는 더더욱 아니고요."

"대리님 그럼 그냥 회사 그만두려고? 우리 회사 들어오려고 고생하지 않았어?"

"네... 그건 맞는데요. 사규... 사규에도 병가는 3개월 이상 입원이 필요한 진단서가 필요하고요.

제가 휴직을 내면 저희 팀에 생기는 공석은... 채워지지 않는 걸로 알아요"

"그건 내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정말? 대리님 말을 그렇게 못 알아들어?"

"아니요. 제가 원하는 건... 그냥 나가고 싶습니다."



"... 원래 희망하던 팀이 어디였지? 지난달에 팀 변경 요청 했었지?

일단 거기로 보내줄게. 거기서 좀 업무 익히다가..."

"아니요... 이곳과 연관된 모든 건 다 잊고 싶어요. 나가지 못하면 어쨌든 계속 연결고리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렇게 그 방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대리, 뭐 계획이 있는 거야?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무작정 나간다고 해?"

"계획 없습니다. 그냥 쉬고 싶어요."

"이제 다시 일 안 하려고?"

"다시 일할 겁니다. 지금 이 회사가 아니라는 거죠."

"뭐? 여기서 이대로 퇴사하고 다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못해"

"..."

"내가 인생 선배로써 말하는데 퇴사하고 쉬고 놀고 하던 사람을 누가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알았다.

그때 그 말만은 내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맞아버렸다는 걸.


"인생 선배요? 제가 나가면 문제가 생기니 붙잡으시는 거겠죠."

"뭐? 대리 주제에 뭘 안다고 나대?"

"본부 성과며 지금 회사에 돌고 있는 소문들 때문에 곤란하신 거 아니세요?"

"허, 얘 진짜 못하는 말이 없네. 조용하고 착한 애인줄 알았더니, 너 이렇게 예의가 없어?"


그때 누군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 팀 한 차장이었다.


"아 상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한번 이야기해 볼게요. 잠시 나갔다 오시죠."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그대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나대리... 여기 나가면 힘들어질 거 다 아는데 그냥 나대리가 한번 참지 그래?"

"... 잘 아시잖아요. 제가 많이 힘들었다는 거"

"뭐 그건 알지만... 아니 그건 그렇고 말이야, 나대리 그 최근에 계약한 집이 전세야 자가야?"

"네??"

"아니 난 그... 뭐 나대리 좋은 일이 있어 그런가 하고 그냥 다들 궁금해하니까"

"더 이상드릴 말씀이 없네요. 저랑 10년 동안 같이 일하셨는데 질문이 그거뿐이세요?"


오늘 아침 열기 힘들었던 그 방문을 나는 가볍게 밀어버리고 그대로 나왔다.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괜찮은지 묻지 않았다.


오늘은 10년을 함께한 그곳에서의 내 퇴사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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