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어쨌든 잘 된 거 아니야?'
바쁜 걸음을 움직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지하철을 타러 오는 길까지
눈치 없는 걱정들은 마음속 한 구석에서 뿌리를 내리고 올라왔다.
싹둑 잘라버려도 바로 그 옆에 뿌리는 내리고 올라오는 걱정들을 없애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쨌든 잘 된 거야. 잘된 거라고.'
'이래나 저래나 결국 내가 원했던 거잖아?'
길을 걷고 있는데 그 길이 맞는 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때는 그냥 가보는 수밖에 없다.
길 위에 그저 주저앉아버릴 순 없지 않은가.
앞이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갯속을 걷고 있어도
저 멀리 어디선가에는 희미한 작은 불빛은 보이기 마련이다.
더구나 나는 이미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만 멈춰버린다는 게 어떤 건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3년 만에 느껴보는 이른 아침의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분명 봄이었다.
불어오는 바람도 봄이었지만 어쨌든 잘 풀린, 내 인생에도 봄이라고 생각할 만했다.
그리고 지금 불어오는 바람에 봄의 따스함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어쨌든 잘 된 거라는' 자기 암시를 걸기엔 충분했다.
걱정을 모조리 뿌리 뽑자 그 자리엔 이제 설렘이 피어올랐다.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도 내 눈엔 필터 낀 안경을 쓴 것처럼 다들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특별한 사명감과 직업의식을 가지고 이른 아침부터 열정에 이끌려 출근하는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된 나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고도 매일 걷는 패턴을 따라 회사 앞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 속에서
어설픈 모습을 숨겨보려고 고군분투하며 회사 건물 앞까지 도착했다.
사전에 안내받은 장소로 가니 인사담당자와 나와 같이 입사를 하는 몇 명 직원들이 보였다.
인사담당자는 한 명씩 이름을 부른 뒤 배정된 부서에 대해 짧게 설명 후 안내를 시작했다.
한두 명씩 자리를 떠나고 마지막 내 차례가 되었다.
"음... 혹시 면접 보실 때 따로 이야기 들은 거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건 없는데요"
"배정되시는... 부서가 바뀌셔서요. 하시는 업무는 크게 다르진 않을 거예요"
"아 네"
"뭐 자세한 설명은 담당 팀장님께 들으시면 되고요. 일단 14층으로 올라가시겠어요?"
이랬던 저랬던 내겐 잘된 일이었다.
3년 만에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가족들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남들이 알만한 이런 회사에서 입사할 수 있었던 것도,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된 것도,
부서가 바뀐 것쯤이야 별 것 아닌, 잘 된 일이었다.
뭐 그땐 그랬다.
14층에 도착하니 팀장쯤 돼 보이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 대리님 맞죠?"
잠겨져 있던 사무실 문이 열리고 긴 복도를 따라 들어갔다.
"일단 여기에 앉으시면 돼요"
버리려고 노력했고 결국 도망쳐버렸지만 다시 갖고 싶어 와 버린, 내 자리였다.
낯설고 익숙했다.
제각기 손가락 연주를 하는 키보드와 마우스의 리듬을 제외하고 나면 사무실은 적막했다.
어느 회사 사무실이던 비슷한 모양이겠지만 말이다.
잠시 뒤 팀장님은 내 책상을 톡톡 두드리더니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사무실 옆 작은 탁자 하나 의자 둘.
리듬감 없는 걸음걸이에 마른 몸, 생기 없는 표정.
‘팀장’하면 머리속에 그려지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뿔테 안경 사이로 보이는 의외의 날카로운 눈빛까지.
"장 대리님, 내가 이 팀 팀장이고요. 우리 팀 업무에 대해서 듣고 온거 있나요?“
"아 네… 들은 건 없고 팀 배정 후에 듣게 된다고 알고 왔습니다."
"아... 우리는 팀은 세로를 담당해요. 팔고자 하는 사람과 사는 사람 모두가 우리 고객이고요. 장 대리님은 주문부터 환불까지가 업무 영역이예요.“
팀장은 어벙한 내 표정을 한번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전에 하던 일과 비슷하죠? 어렵지 않을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