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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제일 늦게 집에 가는 아이

그리고 아이와 함께 항상 같은 자리에 서 있는 한 사람

by 허군

요즘은 하교 후에 놀이터보다 학원으로 가는 아이들이 더 많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교 후 학원 셔틀을 타고 곧장 사라지는 친구들을 보며 아들도 처음엔 어리둥절해했다. 유치원 때 함께 놀던 친구가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놀이터에 남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걸 아들도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지켜보는 우리도, 어딘가 아쉬운 마음을 숨기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우리가 남들과 다르게 뭔가 특별한 철학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우리는, 아직은 아이가 밖에서 뛰어노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숨이 찰 만큼 달리고, 손이 시릴 만큼 놀고, 친구들과의 규칙을 스스로 만들고 바꿔가며 놀이를 이어가는 과정. 누군가와 다투고, 토라지고, 그러다 다시 웃으며 손을 잡는 그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아이는 자란다고 믿는다.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관계의 온도, 몸으로 익히는 사회성, 놀이를 통해 얻는 집중력과 자율성. 우리는 그걸 아들이 되도록 오래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이의 성향이나 각자의 상황에 따라 선택은 다를 수 있다. 누군가에겐 학원이 더 맞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겐 그게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순 없다. 다만, 지금 우리 가족이 내린 선택은 아직은 놀이터에 있다. 우리는 조금 더 오래, 아들이 ‘놀 수 있는 아이’로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다. 공부는 조금 늦게 시작해도 괜찮지만, 친구들과 놀며 시간을 보내는 경험은 지금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지켜주는 한 사람이 있다. 매일 하교를 마치고 놀이터에 들르는 아들과 그의 단짝 친구. 해가 지고 가로등 불빛이 켜질 무렵까지, 그 둘은 늘 마지막까지 놀이터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나 아내가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는 날에도 아내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 옆에 머문다. 하루하루가 그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내는 아이가 마음껏 놀 수 있는 환경을 매일같이 지켜내고 있었다.


겨울 어느 날, 퇴근 후 가끔 아이를 데리러 가면 나는 그저 30분도 안 돼 손끝이 시리고 몸이 굳는데, 아내는 그 추위를 매일 견딘다. 말없이 기다리고, 조급해하지 않고, 아이가 “이제 집에 가자” 할 때까지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다. 누군가는 그저 아이를 지켜보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안다. 그건 단지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아이가 아이답게 자랄 수 있도록 옆에서 만들어주는 ‘온전한 시간’이라는 걸.


저녁노을 아래에서 친구와 어깨동무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의 뒤에는 늘 아내가 있다. 아이는 아직 모른다. 자신이 얼마나 큰 사랑 안에 자라고 있는지를.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늘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 얼마나 따뜻하고 오래된 것이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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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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