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연애에 대한 반응에 관하여.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내가 브라질 사람과 연애한다는 것을 밝히면 반응은 제각각이다.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를 써보자면,
A: 너 남자친구 있니?
나: 응.
A: 어, 근데 왜 한 번도 못 봤지? 뭐 하는 사람이야?
나: 대학원생이야, 외국에 있어.
A: 아, 유학 간 학생 인가 보구나.
나: 아니, 외국인이야.
A: 헐? 어느 나라 사람?
나: 브라질 사람이야.
1번 반응) A: 뭐? 브라질? 야, 너 얌전하게 생겨가지고 완전 반전이다.
2번 반응) A: 완전 로맨틱하겠다. 나도 외국 사람이랑 연애해보고 싶어.
3번 반응) A: 보통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힘들겠다.
내가 가장 고마운 반응은 3번. 그저 내가 겪는 고통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이해해줬다는 데에 고마움을 느낀다. 2번은 남녀 불문하고 최근에 많이 듣는 답변인데, 그들 나름대로의 환상이나 편견에 기반한 반응이므로 굳이 논하지 않겠다. 나를 가장 불쾌하게 만드는 건 1번과 같은 반응이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직접 들었던 반응이다. 그리고 이런 반응은 주위에서 생각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번 반응을 낱낱이 살펴보도록 하자. 내가 불편하게 느낀 점은 크게 3가지다. 가장 먼저, 반문 파트. "뭐? 브라질?" 그들의 귀를 의심하는 단계일 터이다. 이 반문도 뉘앙스가 굉장히 중요한데, 물론 친숙하지 않은 나라이다 보니 단순히 놀라움을 나타내기 위한 반문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코웃음이 섞인 반문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대체로 뒤에 이어지는 말이 '너 얌전하게 생겨가지고 반전인데?'와 같은 내용이라면 후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둘째로는 '너 얌전하게 생겨가지고.' 내가 얌전하게 생겼다고? 이건 칭찬이야 욕이야? 이런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때로 본인의 스타일대로 옷을 입거나 화장을 하고 나가면 '발랑 까져보인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면서 그런 반응보다야 낫지 않겠냐고 했다. 그 친구의 씁쓸한 미소를 보다가 왜 애초에 누군가 타인의 한 마디로 '얌전하거나 발랑 까진 애'라는 꼬리표가 붙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얌전하게 생긴' 내가 브라질 사람과 연애하는 것은 왜 반전인가? 반전이라는 말은 누군가 예상하고 있는 상황과 정반대의 혹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들의 말을 백번 양보해서 내가 얌전하게 생겼다 = 바르고 성실하며 참하다, 라는 긍정적 의미로 해석할 때, 나에게 예상되는 연애 양상은 어떤 걸까. 나와 같이 바르고 성실하며 참한 한국 사람과의 연애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그들의 예상과 달리 나의 답변은 어디서부터가 반전인걸까? 브라질 사람이면 바르고 성실하고 참하지 않아 보여서? 혹은 한국이 아닌 브라질 사람과 연애한다는 것부터? 그 반전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브라질 사람과의 연애는 얌전한 너에게서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의미를 내게 전달하고 있었다.
나 역시 모든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분명 내가 모르는 순간에 편견들은 불쑥 튀어나와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내 사고의 발목을 붙잡기도 한다. 누구나 적어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편견이라고, 그렇게 심각하게 치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와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우리 사회에서 그 어떤 편견의 희생양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이제 나를 둘러싼 안개 같은 편견을 마주하고 있다. 그 편견에서 나를 잘 모르는 이들뿐 아니라 친구들, 가족들 역시 자유롭지 않다.
'브라질'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몇 가지 대표적인 단어들이 공식처럼 나열된다. 정열의 나라, 삼바, 축구, 여유로운 해변가, 늘씬한 미녀들? 그리고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브라질 '사람'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 나라를 수식하는 단어만큼이나 긍정적인 이미지도 있을 테지만, 우리 사회에서 바라보기에 지나치게 정열적이고 '발랑 까진' 사람들이라는 편견도 고개를 들 것이다.
나는 그에게 '브라질 사람'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을 설명하기 부끄러웠다. 또 '외국인과 연애하는 한국 여자'에 대한 편견을 설명하기도 부끄러웠다. 두 편견 모두 잘못되었고 우리는 그 편견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기에 떳떳할 수 있었지만, 그저 숨죽이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런 편견을 마주했을 때 화끈거릴 나의 얼굴을 상상만 해도 괴로웠다. 그가 처음 한국에 방문했을 때, 내가 '공공장소에서는 손 안 잡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하자 당황하던 그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편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내가 '브라질 사람'과 연애하고 있음을 숨겨왔다. 그저 남자친구가 없거나 간혹 만나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우리가 함께 한 3년 중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나의 삶에서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왔다. 나는 편견과의 기나긴 숨바꼭질이 끝나기를 바랐지만, 결국 술래 앞에 내가 나서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는 게임이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드디어 공개했다. 내가 '그'와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내가 이런 얘기를 글로 옮길 것이라 하니 그가 웃었다. 한국이나 브라질이나 편견과 맞서 싸우는 건 똑같다면서 말이다. 내가 처음 브라질을 방문하기로 한 날, 그는 가족들이 나의 방문을 정말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한창 화기애애한 이야기가 오고 가다가 문득 그의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께서도 나를 반겨주실까? 하고 내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더니 그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You should be okay, as long as you are not black."
그는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백인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브라질 남부 지역은 대부분의 인구가 유럽계의 후손인 백인이다. 원주민과 흑인 인구가 대다수인 브라질 북동부와 굉장히 다른 인종 분포를 보인다. 그의 가족들 역시 이탈리아계로 모두가 백인이다. 브라질 남부에서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다. 실제로 그와 함께 대학을 다닌 브라질 친구 커플은 여성이 백인, 남성이 흑인인데 함께 쇼핑을 할 때마다 매장 내 security 직원이 둘 중 남자 친구만을 성가실 정도로 졸졸 따라다닌다고 한다. 물건을 훔쳐갈까 봐서다.
그와 같은 젊은 세대 사이에선 인종차별이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부모님, 조부모님 세대에서는 인종차별은 뿌리 깊은 편견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내가 흑인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며 웃으실지 몰라도, 그 뒤에 또 다른 편견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나는 백인을 제외한 다른 인종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나에게 알 수 없는 시선이 꽂히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우리의 고향 중 어느 곳도 너와 나의 만남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생각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견디기는 힘들다. 나의 연애를 둘러싼 무수히 많은 편견과 소문은 오늘도 내 주위를 떠다니고 있다. 그 언제쯤, 우리가 연애한다는 사실이 그저 '우리가 연애한다는' 군더더기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