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방관사이

악의 없는 방관을 믿음이라 생각하는 그대에게

by 은정

참는 것, 그것이 내가 받은 가장 큰 칭찬이었어.


한 자루나 되는 콩깍지를 함께 까던

언니랑 오빠는 화장실을 핑계로 도망가고

도망갈 용기도 없어 남겨진 나는

어린 손가락이 아리도록 끝까지 콩깍지를 깠어.

어른들은 "얘는 참 착해.""참을성이 있어" "성실해"

끝없는 칭찬을 하셨고,

나는 그 다음번, 그 다다음번도 그렇게 앉아

죽을힘을 다해

콩도 까고, 마늘도 까고, 심부름도 했어.

할만해서가 아니라,

어른들의 믿어줌에 고마워서.

어른들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는 말이 싫었어.

그 깊은 의미가 싫은 게 아니고.

그 고래의 입장을 나랑 동일시해보니,

고래는 헤엄치며 칭찬받고 싶을 거 같아

그리고, 사람은?

어린애나 어른이나, 충분히 감당할 일.

그런 일을 잘할 때 칭찬하는 거야.

고래를 춤추게 하지 말자는 게 내 마음.

그 고래는 내 마음의 고래니까 오해는 말고.


길도 모르는 키 작은 아가가,

학교 가는 버스를 혼자 태워도 울지도 않았어.

엄마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니까.

그 아가가, 매일을,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까?

무사히 집에 갈 수 있을까? 이런 맘으로 학교를 다녔지.

그런 날 엄마는 나를 믿고 버스를 타라 보내는 거잖아.


그렇지만, 이제는 알아.

악의 없는 그 믿음이, 방관일 수 있다는 걸.

어른들은 몰랐고 지금의 나는 알아.

그것이 믿음이 아니고, 방관이었다는 걸.


지금은? 부탁하고 싶어.

어른들이여, 아이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방관하지 말자.

반대로, 칭찬이란 이름으로 억압하지도 말자.

고래는 그냥, 고래답게 헤엄치는 게 대단한 거야.

칭찬으로 기쁘게 할 수 있는 일,

믿어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가만히 들여다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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